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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33강] 아이러니를 활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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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33강] 아이러니를 활용하자
글/ 이상옥 교수. 시인___

아이러니는 어원이 그리스어 에이로네이아(eironeia)이다. 에이로네이아는 변장의 뜻을 가지는 것으로 내용을 은폐하는 의미이다. 이는 고대 희곡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분류한 두 부류의 주인공 에이론(eiron)과 알라존(alazon) 중에서 에이론과 관련이 있다.
극중에서 알라존은 강자이지만 우둔하고, 에이론은 약자이지만 현명하다. 표면적으로 볼 때 알라존이 승리할 것 같지만, 반대로 에이론이 승리한다. 즉, 아이러니는 에이론의 역할에서 발생한다고 본다. 알라존이 승리할 줄 알았는데, 에이론이 승리함으로써 뒤집힘이 발생한 것이다. 성서의 골리앗과 다위의 대결이 아이러니의 전형이 아닐까 한다. 다위은 아직 소년이고 골리앗은 거인이다. 그런데, 누가 보아도 골리앗이 승리할 줄 알았는데, 다윗이 거구 골리앗을 이긴 것이다. 여기서 통쾌한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아이러니는 그러니까 반어(反語)다. 표면적 진술, 즉 겉으로 말하는 것과 속으로 뜻하는 바가 전혀 반대로 나타나는 어법인 것이다.
아이러니는 단순한 시의 수사기교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역사, 우주의 모순 구조를 파악하는 세계관 우주관과는 연관되는 것이다.
선한 사람이 복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선한 사람이 비참한 처지로 전락하고, 망하게 되는 상황이 이 세상에는 비일비재하다. 반대로 악인이 성공하고 번성하는 상황이 또한 비일비재하다. 이 세상은 아이러니칼한 세상이기도 하지 않는가.
시인도 아이러니스트다. 유한적 존재인 인간이 신의 세계를 동경하고 노래하고, 그래서 좌절할 수밖에 없는 시인은 얼마나 아이러니칼한 존재인가.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의 이라는 시를 보면 잘 나타나지 않는가.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은 낭만적 아이러니스트인 시인정신을 대변하고 있지 않은가. 영원을 탐하지만, 결국 도달할 수 없는 비애에 잠기게 되는 시인의 비극적 아이러니여. 이 시를 보면, 아이러니는 단순한 기법으로 그치기보다는 시인정신, 세계관에 바탕이 되고 있다. 깃발의 이미지를 통해서 현실과 이상의 괴리, 차이 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김준오 에서도 "아이러니는 '거리'의 정신이며 객관적 정신이다. 여기서 '거리'는 자아와 세계의 외적 거리인 동시에 분열된 자아들 사이의 내적 거리도 포함한다. 이런 점에서 아이러니는 비서정적 성격을 본질로 한다."고 말하고 있다. 아이러니는 거리가 핵심적 원리라고 볼 수 있다. 메타포는 이질적인 두 사물 사이에서 유사성을 지각하는 것이라면, 아이러니는 반대로 유사한 두 사물을 분리시켜서 차이성을 지각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유사성을 발견하려는 은유(비유)가 서정적 비전이라면 차이성을 지각하려는 아이러니는 비서정적 비전이라 할 만하다. 어쩌면 현대시에는 비서정적 비전이 압도하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자아와 세계의 분열뿐만 아니라 내적 자아의 분열 체험을 현대인들은 얼마나 하는가.
따라서, 시인은 아이러니의 애호가가 될 수밖에 없다. 시인은 신과 대결하고, 사회와 대결하는 존재이다. 때로는 자아의 분열로 고통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신과 인간의 대결국면에서 가장 치열한 모습을 보여준 시인이 김현승이 아닌가 한다. 그의 절대 고독의 세계는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인간과 신의 갈등구조에서 유발한 '고독'을 매우 심도있게 노래했다. 그러나 그는 말년에 하나님과의 세계에 안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쨌든, 김현승 시인은 기독교적 아이러니를 보인다.

껍질을 더 벗길 수도 없이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

그늘에 빚지지 않고
어느 햇볕에도 기대지 않는
단 하나의 손발

모든 신(神)들의 거대(巨大)한 정의(正義) 앞엔
이 가느다란 창끝으로 거슬리고
생각하던 사람들 굶주려 돌아오면
이 마른 떡을 하룻밤
네 살과 같이 떼어 주며

결정(結晶)된 빛의 눈물,
그 이슬과 사랑에도 녹슬지 않는
견고(堅固)한 칼날 발 딛지 않는
피와 살

뜨거운 햇빛 오랜 시간의 회유(懷柔)에도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 악기(木管樂器)의 가을
그 높은 언덕에 떨어지는,
굳은 열매

쌉쓸한 자양(滋養)
에 스며드는
에 스며드는
네 생명의 마지막 남은 맛!
-김현승,

이 시의 '견고한 이미지'는 신과의 대결국면에서 발생한 것이다. 신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단단하게 인간적 의지로 무장한, 그 자아 단련 이미지가 단단하게 마른 흰 얼굴이다. 그것으로 모든 신들의 거대한 정의 앞에 대항하는 것이다. 신에게 구원을 의뢰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의지로 구원을 성취하고자 하는 자아의지의 확대이다. 더 휘지 않는 마를 대로 마른 목관 악기의 가을, 굳은 열매 등은 신에게서 떠난 시인의 자아의지의 표상으로 읽을 수 있다. 이 시는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천상에서 지상으로, 신에게서 인간에게로 돌연 자신의 세계관의 변모가 일어난 시기의 작품이다. 한국 기독교시사상에 있어서도 다형의 반기독교적 인본주의에로의 변모는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시기에 다형은 고독이라는 심각한 병을 앓게 된다. (필자의 참조) 인간이 신과 대결국면을 펼치는 것, 이것은 우리 시사상에 일 대 사건인 셈이다.
주지하다시피, 한국현대시에서 신과 인간의 대립구조에서 발생하는 것보다는 사회와 개인간의 갈등구조에서 아이러니스트로서의 면모를 보이는 시인들이 많다. 이상이나 김수영 같은 시인의 고뇌는 시대와 위반된 시인정신에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조남현, , 현대문학사 편 참조)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김소월의 에도 아이러니가 두드러진다. 마치 화자는 어리석고 철없는 존재처럼 위장되어 있지만, 가슴 속에는 비수를 감추고 있지 않은가. 결국, 떠나는 그대가 나를 짓밟고 가는 것임을 얼마나 처절하게 드러내고 있는가. 가시는 걸음걸음마다 놓인 꽃을 밟고 가라는 그 서늘함은 표독하게 이빨을 드러내고 물어뜯는 짐승보다 더 무서운 저주를 이면에 깔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는 단순한 언어적 아이러니만으로 활용되는 것이 아니라 구조적 아이러니가 있다. 구조적 아이러니는 상황적 아이러니와 극적 아이러니가 있는데, 이것들은 시의 구조원리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전자는 어떤 사건, 사실, 상황이 만드는 것이고 후자는 사건 구조를 통해 드러나는 것이다.
현대라는 상황 자체가 아이러니를 유발하고 있지 않는가. 첨단 현대문명 상황하에 놓인 인간들은 얼마나 많은 아이러니를 경험하는가.

마음만 섞어도
애가 서는구나
들통이로구나
체체외수정이란 게
이런 것일 줄
꿈에도 몰랐구나
생소주잔에 섞인
눈빛만으로도
애가 들어서는 줄
마른 입덧을 해가며
처음 아는구나
산월이 다가오는데
부득부득
온 하늘이 불러오는데
어디다
몸을 풀어야 할지
막막하구나
-김언희,

첨단 과학문명이 은 체외수정도 가능하고, 복제도 가능하다. 이 시는 첨단과학기술문명이라는 상황이 빚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생명은 신의 섭리에 속한다는 태초 이래의 진리가 무너지져버리는 형국, 그것이 이 시의 상황적 아이러니를 유발한다.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정치상황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왜곡된 시대상황일수록 아이러니가 빈발 할 수밖에 없다. 극적 아이러니는 흔히, 소포클레스의 같이 사건구조를 통해 극적 반전이 일어날 때 발생한다. 오이디푸스 왕은 선왕의 살해자를 추적하기 시작하는데, 사건이 전개되면서 결국 선왕의 살해자가 자기 자신으로 밝혀지는 것이다. 여기서 오이디푸스 왕은 에이론이고, 독자는 알라존이다.
이처럼 서정시도 아이러니를 바탕에 깐 서사적 구조를 도입하여 시를 창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아이러니는 서정적 비전에만 갇힌 서정시에 비서정비전을 제공함으로써 시의 지평을 넓히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
2006-06-20 21:3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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