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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34강] 역설을 활용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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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34강] 역설을 활용하자

역설(paradox)은 어원적으로 넘어선을 뜻하는 para와 의견을 뜻하는 doxa의 합성어이다. 그러니까, 역설은 상식적인 차원을 넘어선 의미이다. 언뜻 보기에는 진리와 모순된 것 같으나 깊이 생각하면 그 속에 진실이 존재하는 것이다. 경이나 아이러니, 모순 등은 모두 역설을 본질적 요소로 한다는 점에서 역설은 흔히 아이러니와 혼동되고 있기도 하다. 아이러니가 속 내용을 반대로 표현했을 뿐이지, 그 표현 자체에는 모순이 없지만, 역설은 그 표현 자체에도 모순이 있고, 나아가 그 모순 상황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순을 넘어 보다 높은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브룩스가 시어의 특성으로 제시한 '역설의 언어'는 불사조 피닉스의 상징으로 설명된다. 피닉스는 고대 이집트 신화에 등장하는 새인데, 이 새는 수명이 3000년이나 된다고 한다. 그러나 3000년이 경과하여 죽음이 임박하면 이 새는 카르낙 신전의 향로에 들어가 스스로 몸을 불태움으로써 어린 새로 환생하여 또다시 삼천년을 산다는 것이다. 영원히 죽지 않는 전설상의 새가 피닉스이다. 피닉스에게 죽음은 곧 재생이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라든지, 지는 자가 이기는 자라는 것 등이 모두 역설이다. 겉으로 보기에 모순되지만 그 모순을 초월하여 새로운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역설의 본질인 셈이다.
인간답다는 것을 역설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짐승도 아니다. 인간에게는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다. 선만 존재한다면 천사일 것이고, 악만 존재한다면 짐승이 될 것이다. 인간답다는 것은 선과 악이 공존하면서 빚어내는 품성 그것이 바로 인간적 속성이 아니겠는가. 시가 인간을 노래하는 것이라면, 역설이야말로 가장 인간적 본체를 드러낼 수 있는 기법이 아닐 수 없다.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역설은 시의 행 같은 일부에 사용되는 부분적인 역설이 있고, 시의 전체에 작용하는 구조적 역설이 있다.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윤동주, 부분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유치환, 부분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 부분

깊이깊이 새겨지는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위에
-김지하의 부분

인구에 회자하는 모순형용으로 일컬어지는 역설은 시의 부분에 작용한다고 볼 수 있다. 김준오는 그의 에서 표층적 역설이 시행에 나타나는 부분적 역설이라고 하며, 시의 구조 전체에 나타나는 역설을 시적 역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시적 역설은 진술자체가 앞 뒤 모순되는 것(표층적 역설, 모순어법)이 아니라 진술과 이것이 가리키는 상황 사이에 명백한 모순이 나타나는 경우를 말한다. 물론, 이 모순은 모순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함축하고 있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아이러니와 혼동되는데 여기서 역설이 아이러니를 동반한다는 브룩스의 견해를 원용한다.
김준오는 김소월의 많은 시들이 표면상 평이하고 단순한 진술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단순함으로 그치지 않는 것은 역설 때문으로 본다.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 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김소월,

이 시에는 모순적 상황이 다수 존재한다. 먼 훗날의 상황을 '잊었노라'라는 과거시제로 표현하는 것 같은 부분적 역설보다도 이 작품 전체 깔려 있는 역설적 상황을 주목해야 한다. 님이 부재하는 '어제'와 '오늘'엔 님을 잊지 않고 있다가, 님이 돌아오면 님을 잊어버리겠다는 것이다. 이런 모순은 모순된 상황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서 화자의 간절한 그리움의 내적 진실을 더욱 실감나게 한다는 것이다.
역설이 아니고서는 얻을 수 없는 시적 효과가 아닐 수 없다. 시가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것 같아도 시 구조 전체에 역설이 기능함으로써 시가 단순성을 극복한다. 이 시를 읽으니까, 나의 과거 처지가 떠오른다.
나는 1994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9년 이상 근무하던 교사직에 사표를 내었다. 그리고는 진주교대, 경남대, 창원대, 거제대뿐만 아니라 저 멀리 강원도 태백까지 1주일에 1박 2일로 코스로 왕복 16시간씩 손수 운전하며 시간강사 노릇을 하였다. 그런 중에 몇 번의 전임기회가 무산되니까 오기가 생겨, 내가 만약 전임이 된다면, 2-3년 근무하다가 사표를 내어버려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의 화자가 님이 돌아오면, 떠나버리겠다는 심경이 바로 나의 심경이었다. 이 얼마나 절박한 국면인가. 그후 99년에 자리를 잡아 벌써 4년째가 접어들고 있지만, 나는 아직 사표를 내지 않고 있다.
내가 박사학위를 취득할 때부터 지금까지 나의 삶이 바로 역설이 아닌가 한다. 이처럼 인간의 삶은 역설적 상황에 놓인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파란만장한 우리네 삶을 기록하면, 그것이 역설이 되고, 시가 될 것이다.
2006-06-22 13:5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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