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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44강] 김소월이 구축한 밤의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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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44강] 김소월이구축한 밤의 시학을 알아두자(1)

김소월의 이름은 시인의 또다른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시인 하면, 김소월, 김소월 하면 시인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1902. 8. 6일 평북 구성(龜城) 출생으로 오산학교(五山學校) 중학부를 거쳐 배재고보(培材高普)를 졸업하고 東京商大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關東大震災로 학업을 계속할 형편이 못 되어 중퇴하고 귀국하였다.
소월은 1920년에 등을 《창조(創造)》지에 발표하여 시단에 데뷔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서른이 채 못 되어 1925년 12월 23일(일설에 의하면 24일) 자살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의 죽음의 원인은 마약 중독으로 추정된다고 본다. 소월 안타깝게도 짧은 기간 동안만 시작에 매달릴 수 있었다. 좀더 긴 시간이 그에게 허락되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시간조차도 천재의 재능을 가두지는 못하는 것 같다.
이 글이 시인론이 아니기 때문에 김소월의 잡다한 이력을 살펴볼 생각은 없다. 그러나 김소월이 그의 시에 영향을 끼친 몇 가지는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05년 무렵에 유학과 한문에 소양이 높은 할아버지의 가름침 밑에서 구학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수많은 민담을 들려주었던 숙모 桂熙永이 숙부 應悅에게 시집옴으로써 소월은 그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고 본다. 김소월 시에 등장하는 그 많은 전통민담들이 그가 어릴 때 숙모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의 시적 영향의 또 하나 결정적인 것은 1915년 5월 오산중학교에 입학하여 안서 시인 김억과 사제관계를 맺은 것이다.
소월의 김억과의 만남은 한국시단의 복이다. 소월이 김억을 만나자 않았더라면, 어찌 오늘의 소월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던가.
소월의 시적 방법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억의 시작태도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김억은 우리 현대시의 초보적 형태인 신체시의 결함을 극복하는데, 일조한 시인으로 평가된다. 신체시는 그것의 선구적 의의도 있지만, 지나친 敎示的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예술성의 확보가 시급한 과제였던 것이다.
신체시의 대표작인 다음의 시를 조금 지루하더라도 일단 읽어보자.

1
처······ㄹ 썩, 처······ㄹ 썩, 척, 쏴······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 바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나나ㅑ, 모르나냐, 호통까지 하면서
따린다, 부순다, 무너 바린다.
처······ㄹ 썩, 처······ㄹ 썩, 척, 튜르릉, 꽉.

2
처······ㄹ 썩, 처······ㄹ 썩, 척, 쏴······아.
내게는 아모 것도 두려움 없어,
陸上에서, 아모런 힘과 權을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모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ㄹ 썩, 처······ㄹ 썩, 척, 튜르릉, 꽉.

3
처······ㄹ 썩, 처······ㄹ 썩, 척, 쏴······아.
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가,
지금까지 있거든 통기하고 나서 보아라.
秦始皇, 나팔륜, 너희들이냐.
누구 누구 누구냐 너희 역시 내게는 굽히도다.
나허구 겨룰 이 있건 오나라.
처······ㄹ 썩, 처······ㄹ 썩, 척, 튜르릉, 꽉.

4
처······ㄹ 썩, 처······ㄹ 썩, 척, 쏴······아.
조고만 산모를 의지하거나,
좁쌀 같은 작은 섬, 손벽 만한 땅을 가지고,
고 속에 있어서 영악한 체를,
부리면서, 나 혼자 거룩하다 하난 자,
이리 좀 오나라, 나를 보아라.
처······ㄹ 썩, 처······ㄹ 썩, 척, 튜르릉, 꽉.

5
처······ㄹ 썩, 처······ㄹ 썩, 척, 쏴······아.
나의 짝 될 이는 하나 있도다.
크고 길고, 넓게 뒤덮은 바 저 푸른 하늘.
저것은 우리와 틀림이 없어,
적은 시비 적은 쌈 온갖 모든 더러운 것 없도다.
조따위 세상에 조 사람처럼.
처······ㄹ 썩, 처······ㄹ 썩, 척, 튜르릉, 꽉.
6
처······ㄹ 썩, 처······ㄹ 썩, 척, 쏴······아.
저 세상 저 사람 모다 미우나,
그 중에서 똑 하나 사랑하난 일이 있으니,
담 크고 순진한 少年輩들이,
재롱처럼 귀업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
오나라 소년배 입맞춰 주마.
처······ㄹ 썩, 처······ㄹ 썩, 척, 튜르릉, 꽉.
-최남선,

이 작품은 봉건시대의 시가에서 근대 자유시에 이르는 과도기적 형태로서 최초의 신체시이다. 봉건시대 시가의 정형률을 극복하려는 시도를 보이는 작품으로 의의를 지니지만, 바다의 힘찬 이미지를 통해서 조선 젊은이가 드높은 민족적 기상에 이르도록 하려는 의도가 매우 강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주제의식이 형식을 압도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지나친 교시성을 드러내어, 시의 자율성이 압살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김억과 주요한은 낭만주의시로서 극복하려 했다. 낭만주의 시의 특징 중 하나가 주관적 감정의 방출일 것이다. 시론에 밝았던 김억은 낭만시의 감정분출을 운율과 시형태로써 통제하려 한 것이다.
김억은 에 발표한 어느 글에서 "조선 사람으로는 어떠한 운율이 가장 잘 표현된 것이 있겠나요. 조선말로의 어떠한 詩形이 적당한가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詩形의 韻律과 호흡'을 강조한 바 있다.
김억은 그 당시에 신체시의 생경함을 극복하는 것으로서 민요조의 서정시를 생각하였던 것이다. 공적인 교시성을 주관적 낭만성으로 극복하고, 그 낭만성을 시의 운율과 형태로서 또한 극복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김억은 자신의 시론을 자신의 시창작 행위로는 완성하지 못했다. 그것은 김소월에게 와서 밤의 시학으로 꽃 피게 된다.
2006-06-22 14: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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