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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45강] 한용운이 구축한 合一上昇의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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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45강] 한용운이 구축한 合一上昇의 시학을 알아두자

한용운의 合一上昇의 시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20년대 우리시단의 풍토를 잠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20년대는 3.1운동의 실패와 함께 시작된다. 온 민족적 역량을 결집시켰지만, 그것이 실패로 귀결됨으로써 맛보는 그 좌절감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바로 시에 직접적인 영향을 가져 왔다. 때마침 수입된 프랑스의 상징주의 시의 영향과 더불어 20년대 초반의 시단은 퇴폐적 낭만주의 시들로 범람하게 된다. 퇴폐적 혹은 감상적 낭만주의 시는 감정의 과도한 노출과 현실 도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영탄적 어법의 과다 구사로 감정의 양식화가 이루어지지 못하게 된 것이다. 현실도피적 성향(꿈이나 밀실, 동굴, 죽음, 눈물 등과 같은 시어를 주로 사용함)의 노골화와 병적 정서의 표출은 결국, 시적 건강성을 훼손한 것이었다. 물론, 현실적 공간을 외면하고 현실도피적 공간 속으로 숨어서 병적 정서를 표출한 것은 당시의 지식인들의 절망감의 표현임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한편, 퇴폐적 낭만주의 시가 지닌 병적 정서의 표출과 현실도피주의 심리를 극복하기 위하여, 당시 새롭게 소개되기 시작한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와 일본의 프로레타리아 예술의 영향으로 카프가 결성(1925년)되면서 지나친 목적주의 시가 주요 경향으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소위 말하는 카프시는 뼈다귀 시라고 일컬어질 만큼 편메시지 중심의 정치구호의 나열과 같은, 예술성의 결여가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한용운(1879~1944)은 이런 시단의 문제점을 일거에 극복할 수 있는 합일상승의 시학을 펼쳤던 것이다. 그는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하며 등단했는데, 당시의 시인들과는 달리 동인 활동을 거치지 않고 기성시단과는 달리 독자적인 시학을 구축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당시 시단의 결함을 극복하는 합일상승의 시학으로 나타난 것으로 볼 수 있다.

나는 서정시인이 되기에는 너무도 소질이 없나 봐요
'즐거움'이니 '슬픔'이니 '사랑'이니 그런 것을 쓰기 싫어요.
당신의 얼굴과 소리와 걸음걸이를 그대로 쓰고 싶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집과 침대와 꽃밭에 있는 작은 돌로 쓰겠습니다.
-

이 작품에서 한용운의 시적 지향점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의 병적 낭만시가 정서를 직접적으로 토로하는 것에 대한 분명한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이다. 여기서 서정시인이란 바로, 나 동인들의 감상적 낭만시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도 좋다. 한용운은 당시 시단의 감상적, 퇴폐적 낭만시의 과도한 정서노출 경향을 비판하면서, 그는 정서일반도의 시에 형이상학적 깊이를 부여했던 것이다.
시가 앝은 감정의 표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는 그보다 훨씬 높은 형이상학적 세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당신의 얼굴과 소리와 걸음걸이를 그대로 쓰고 싶습니다"라는 대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의 '당신', 곧 '님'의 층위가 높고 깊다는 사실이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긔룬 것은 다 님이다. 중생(衆生)이 석가(釋迦)의 님이라면 철학(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薔微花)의 님이 봄비라면 마시니의 님은 이태리(伊太利)다. 님은 내가 사랑할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연애(戀愛)가 자유(自由)라면 님도 自由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들은 이름조은 自由에 알뜰한 구속(拘束)을 밧지안너냐. 너에게도 님이 잇너냐. 잇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니라.
나는 해저문 벌판에서 도러가는 길을 일코 헤매는 어린 양(羊)이 긔루어서 이 시(詩)를 쓴다.

인용문은 시집 (1926년) 서문(군말)이다. 이 군말은 한용운 시학을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님'의 정체를 밝힌 것이 군말이다. 그의 대표작 을 그냥 아름다운 연시로 한정하여 읽을 수 없도록 '님'은 매우 형이상학성을 띄고 있는 것이다.
한용운의 '님'의 정체는 군말에서 밝혔듯이, 종교(석가), 철학(칸트), 자연(봄비). 정치(마시니)처럼, 님은 한 층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종교, 사상, 정치, 자연의 모든 영역을 넘나드는 상징인 것이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야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 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얐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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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시가 단순한 연애시가 아니라 형이상시라고 일컬어 만한 것은 '님'의 상징성이 크게 작용함은 주지하는 바다. 한용운은 당시 문단권 밖의 존재였지만, 시의 정체성에 대해서 이미 혜안을 지니고 있었다. 위의 시에 대해서는 익히 잘 알고 있겠지만, 한가지만 강조해 두고자 한다. 그것은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 하얐습니다."라는 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사상적 형상화이다. 님의 現存과 不存의 소통구조를 보이는 것이다. 님이 있는 것이 없는 것이고, 없는 것이 있는 것이 되는 세계, 즉 님이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한 것이 되는 패러독스의 형이상학적 세계 속에서 상식적 인식은 무화되는 것이다.
그냥, 산문적 진술 같고, 단순한 연시 같은 이 시가 마치 말씀이 육체가 된 것 같은 탁월한 형상성을 보인 것은 방금 지적한 것 같은 형이상성의 세계까지 시적 정서를 끌어올린 때문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이 시는 20년대 우리 시단의 보배가 아닐 수 없다.
정서의 표출만으로 시가 된다고 생각했던 당시의 병적 낭만시와는 달리 높은 사상성을 부여한하여, 형이상시의 가능성까지 보인 이 시는 우리시의 사상적 기반을 일층 상승시킨 것이다. 이는 한용운이 지니고 있던 높은 종교철학적 사상성에 기인한다.
한편, 프로시가 이데올로기만 과도하게 노출되어 뼈다귀시의 황량함을 보인 것에 대해서도, 한용운의 시가 연시로 읽혀질 만한 풍부한 서정성을 토대로 형이상학적 세계를 열었기 때문에 사상성 일반도의 프로시를 극복할 수 있었다.
한용운은 당시의 병적 낭만시와 프로시의 결함을 지양 극복한 것이다. 그래서, 한용운이 2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이 아닌가.
한용운의 合一上昇의 시학에서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시는 정서와 사상의 통합이 어우러져야 한다는 것이다. 정서에만 치우치면 감상적 낭만시가 될 것이고, 사상에면 치중하면, 카프시와 같은 뼈다귀 시가 될 것이다.
둘째, 좋은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종교적 철학적 소양이 필요하다. 종교인이 아니더라도 성서, 불경 혹은 유학경전 같은 책들을 늘 가까이 해서, 시의 궁국적 지향점을 형이상학적 세계에다 둘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셋째, 역시 좋은 시는 상징성이 풍부해야 한다.
2006-06-22 14: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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