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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46강]시문학파의 모국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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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46강]시문학파의 모국어 사랑을 배우자
글/ 이상옥 교수. 시인___

1930년대 박용철과 김영랑으로 대표되는 시문학파는 시의 무목적성을 표방한 순수시 운동을 펼쳐서 일정한 성과를 거두었다.
시문학파 이전에는 시의 언어는 시인의 정서나 사상을 표현하는 도구로 본 측면이 강했다. 특히, 정치적, 사회적 목적의식에 사로잡혔던 카프계열의 시를 배격하고, 시 본연의 예술성을 추구했던 시인들로서, 시는 곧 언어의 탐구라는 첫 인식을 보였다는 측면에서 기억해둘 만하다.
그래서, 시문학파는 언어를 보석처럼 조탁(彫琢)했던 것이다.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였다. 시가 언어예술이라는 관점을 가장 뚜렷이 확보한 이들이 바로 시문학파이다.

시의 심경(心境)은 우리 일상 생활의 수평 정서(水平情緖)보다 더 고상하거나 더 우아하거 나 더 장대(壯大)하거나 격월(激越)하거나 어떠튼 더를 요구한다. 거기서 우리에게까지 무엇이 흘러나려와야만 한다.(그 무엇까지를 세밀하게 규정하려면 다만 편협에 빠지고 말 뿐이나) 우리 평상인(平常人)보다 남달리 고귀하고 예민한 심정이 더욱이 어떠한 순간에 감득(感得)한 희귀한 심경을 표현시키는 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흘려주는 자양(滋養)이 되는 좋은 시일 것이니 여기에 감상이 창작에서 나리지 않는 중요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인용문은 창간사의 일부이다. 이 글에서 낭만주의적 시인 천재설이나 영감설을 영향을 엿볼 수 있겠으나, 그것보다는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시가 일상 생활의 수평정서보다 상위의 무엇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높은 이상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한마디로 시의 예술성이라 할 것이다. 오늘의 시론으로 볼 때 예술성이라는 개념도 너무 복잡다기한 개념이 되었지만, 당시에 그들의 예술성 추구는 시의 순수성의 확보와 일맥상통하는 개념이었다.
소위 시문학파는 순수시를 지향했던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순수시는 언어자체나 그 음조가 중시되며 의미나 사상, 교훈 등을 전하지 않으려는 시를 말하는데, 다시 말해 그것은 작품에서 비시적(非詩的)인 불순한 요소를 제거하여 순수하게 시적인 차원을 개척하고자 한 시로 그 지향이 절대적인 차원에 도달하려는 데 있다고 보아 절대시(絶對詩, absolute poetry)라고도 한다. 현대시에서 미국의 스티븐이 순수시의 작가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시문학파의 언어에 대한 절대적 관심이다.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돋쳐 오르는 아침날 빛이 빤질한
은결을 도도네.

가슴엔 듯 눈엔 듯 또 핏줄엔 듯
마음이 도른도른 숨어 있는 곳

내 마음의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김영랑,

창간호(1930. 3)에 발표한 이 시는 순수시라는 새로운 영역을 펼쳐보인 작품으로 평가된다. 남도 사투리의 부드러운 순화, 생기가 감도는 가락과 짙은 향토색, 감미로운 서정성을 보이는 작품이다. 즉, 언어의 조탁이 돋보이는 시이다. 시는 언어가 수단 아닌 목적이고, 그 언어는 시인에 의해 생명성을 부여받아 아름다운 존재로 창조돠는 것이다. 인용작품은 위의 특성이 잘 드러난다. 유미적인 언어의 아름다움이야말로 순수시의 이상인데, 위의 시에서 확인되는 것이다. 언어를 조탁하여, 거기다 정교한 율조를 부여함으로써 인간 내면의 순수 서정을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20년대 카프계열에 의해 시적 언어는 이념으로 오염되었다. 앞에서도 말한 뼈다귀시는 바로 이데올로기에 시가 점령되어 언어조차 황폐화된 것이 아니었던가. 김영랑으로 대표되는 시문학파는 언어에 침착된 비시적인 사상이나 이데올로기를 제거하여 언어본연의 아름다움을 회복시키려 했던 것이다.
시문학파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그것을 시의 언어로 사용하는데 앞장 섰던 시인들이다.
무릇 시인은 모국어 사랑에 헌신해야 한다고 본다. 강의가 딱딱해져가는 느낌이 들기 때문에, 좀 쉬어가는 의미로 얼마전 뜨거웠던 영어 공용화 찬반 토론의 담론 하나를 같이 읽어보고자 한다. 우리말 살리는 겨레모임' 공동대표인 이대로씨의 주장의 일부이다.

우리 말글을 쓰는 4천만을 상대로 소설을 써선 돈벌이가 잘 되지 않으니 16억 영어 인구를 상대로 영어 소설책을 써야 많이 팔 수 있다. 우리도 빨리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는 소설가들의 주장에 대해-
우리 말글을 이용해 돈벌어 먹는 소설가들이 그런 주장을 한 것이 뜻밖이어서 왜 그런 주장을 했느냐고 내가 물으니 더 돈을 많이 벌기 위해 또 어려서부터 영어 공부를 시키고 배운 영어를 잊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 영어 공용화가 필요하다고 했다. 자신은 수십 년간 수십 편의 소설을 썼는 데 별 재미를 못봤다면서 후손을 위해 욕먹을 각오를 하고 자기가 나선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때 소설이 잘 팔리지 않은 것은 그 소설의 작품성과 수준이 낮기 때문이라곤 생각하지 않는가, 말초 신경이나 자극하는 단순한 흥미거리에 엉터리 말글로 질 낮은 소설을 아무리 많이 쓰면 무엇하는가, 우리 말글로도 수준 높은 좋은 소설을 쓰면 잘 팔린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영국의 섹스피어가 지금 우리의 한문과 같은 라틴어가 아닌 지금 우리 말글과 같은 자기 모국어인 영어로 좋은 소설을 써서 영어를 빛내고 영국인들의 긍지를 드높히고 영국을 강국으로 만들 기초를 닦았다는 것을 모르는가, 좋은 문학작품은 자기 모국어로 나온다고 한다,
단테의 신곡도 괴테의 아름다운 시도 모국어로 썼다고 한다, 왜 우리 소설가들은 그들처럼 모국어로 셰계 명작을 써볼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 모국어를 버리고 남의 말글로 글을 써야 잘 팔리고 돈을 잘 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아 못했다.

위의 담론이 보여주듯이 오늘 우리 언어는 지구촌 시대에 심각한 위기국면에 처했다. 작가들마저 영어를 공용어로 하자고 말하고 있는 터가 아닌가. 일제의 억압시대에 우리언어를 사랑하고 우리언어를 조탁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던 시문학파의 노력이 새삼 돋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시인은 우리의 언어를 갈고 닦는데 앞장 서야 할 의무가 있다. 섹스피어가 영어를 오늘의 세계어로 만들었고, 괴테가 독일어를 세계어로 만들었듯이, 현대시인들도 우리말을 세계적 언어로 만들 책무가 있는 것이다.
2006-06-22 14: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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