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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인생은 한 편의 긴 수필
이름
이상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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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화일

인생은 한 편의 긴 수필 / 김국자


아침에 눈을 뜨면 글 쓰는 일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숨을 쉬듯이 글을 써 본다. 내가 살아 숨쉬고 있구나 확인도 하고 흐르는 시간을 종이 위에 머물게도 한다. 그리고 삶의 에너지가 글자로 변하여 하얀 종이 위에 그 자취를 남기고 있는 것을 보면서 조금은 흐뭇한 기분 속으로 빠져 들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말을 하고 싶은 욕망도 있고, 글을 쓰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다. 말을 많이 하면 마음속이 후련한 느낌은 있지만 말이 들어 있던 자리가 텅 비어지면서 허무해진다. 그런데 글을 많이 쓰면 가슴이 가득해지는 느낌이 든다. 그릇에 담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릇에 담는 것도 시(詩)라는 그릇도 있고, 소설이라는 그릇도 있지만 내가 비색(翡色)의 청자 항아리 같은 수필을 좋아하는 것은 글 속에서 인품의 향기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일보 문화센터에서 수필을 만났다. 그것은 필연이었다고 본다.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가득 고여 있었기 때문이다. 수필을 공부하다 보니 그 영역이 넓고 쓰는 사람도 많음을 알았다. 전문적인 수필인 말고도 시인, 소설가, 철학자, 과학자, 종교인, 방송인 등 많은 사람들이 수필집을 내고 있다. 그들은 전문적인 지식과 그들 나름대로의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렇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부끄러움까지 느낄 때도 있었다.

일찍이 이태준 선생은 '수필은 자기의 심적나체(心的裸體)다'라고 했다. 다시 말해서 마음의 옷을 벗는 작업이다. 어떻게 옷을 곱게 벗어 보이느냐에 따라서 좋은 글이 되기 때문이다. 시(詩)나 소설은 옷을 벗은 후 다시 좋은 옷으로 갈아 입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하지만 수필은 그냥 곱게, 그것도 감정을 삭이면서 열쩍은 미소를 머금고 벗을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예쁜 몸매를 가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다. 가혹한 운명의 화살을 맞고 참고 견디는 것이 장한 일이냐, 아니면 ---, 죽는 일은 잠드는 일, 잠들면 꿈을 꾸겠지. 아아, 그것이 문제다. 독백하는 '햄릿' 뒤에는 셰익스피어의 고뇌와 갈등이 있다. 하지만 햄릿의 옷을 입은 셰익스피어는 멋져 보인다.


주렴(珠簾)을 반쯤 걷고 그린 듯이 앉아 있다 아미(蛾眉)를 찡그린다. 옥 같은 볼을 적시는 이슬 누구를 원망하는 것일까. 그림 같다.


이 시에서 우리는 이백(李白)의 마음을 구슬을 꿰어 만든 발을 통해서 보는 듯하다. 그러나 '나'로부터 시작하는 수필은 한 조각의 천으로도 가릴 수 없는 전라(全裸)의 몸으로 주어진 환경 속에서 고뇌하며 고통 받고 갈등할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대신 고민해 줄 햄릿이나 조금이라도 가릴 수 있는 주렴도 없는 것이다.

고뇌와 갈등에 있어서도 수필 장르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소설가나 시인처럼 남을 위한, 아니 어떤 주인공을 위한 고뇌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자신의 고뇌인 것이다. 누구에게나 있어서 세상은 자기가 아는 만큼만 보이고 느끼며 감동한다. 그러므로 고뇌와 갈등도 자기만큼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인이나 소설가는 일상이 싫으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어디든지 어느 시대로도 도망가서 원하는 만큼 꾸밀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필은 그렇지가 못하다. 그러므로 문학이라는 장르에서 소외되고 인기가 없을 수도 있지만 그 일이 덜 인기가 있다손 치더라도 묵묵히 받아들이는 마음이 바로 수필을 쓰는 마음이다. 마음 한편으로는 모든 문학의 모태(母胎)가 바로 이 작업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드는 때도 없지 않다.

한밤중에 읽은 짧은 수필 한 편이 긴 장편소설보다 더 마음에 다가오면서 다음날을 살아가는 데 큰 힘을 주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수필의 몫을 다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글을 쓰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심히 넘기던 사소한 일들을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돋보기를 대고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싹이 올라올 기미도 없는 언 땅을 한없이 들여다보는가 하면, 마른 나뭇잎 하나, 얼어 죽은 풀 포기 하나도 그냥 무심히 보이지 않는다. 국화 속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벌 한 마리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나무 위로 기어오르는 개미들의 행렬에 시선을 맞추기도 한다. 떨어지는 꽃잎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가 하면, 나무에 기대 서서 뿌리로부터 빨아들이는 수액의 소리를 들어보려고 귀를 기울여 보기도 한다. 비 그친 후 참새들이 재재거리는 소리가 싱그럽게 들리는가 하면, 공중에 나는 새의 발자국을 보려고 고개를 한없이 돌려 보기도 한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그들이 혹은 내가 줄 수 있는 것과 줄 수 없는 것을 생각해 보고 줄 수 없는 것, 받을 수 없는 것을 끝없이 기대하면서 가슴 아파하거나 섭섭해 하지 않기로 마음먹어 본다. 급한 성미도 누그려뜨려 보고, 화내는 사람을 한 박자쯤 느리게 바라보는 여유도 가져 본다. 행복한 사람의 이야기보다는 힘들고 외롭고 쓸쓸한 사람의 이야기, 인생살이의 수고와 고달픔 속에서도 위트와 해학을 읽지 않고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애정 어린 눈빛으로 바라볼 수 있는 따스함을 지녀 보려고 애를 쓴다.

글 쓰는 일은 힘든 작업이다. 그러나 '당신은 왜 글을 쓰시오'라고 물으면 쓰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은 무엇 때문이라고 감히 대답해 본다.

인생은 한 편의 긴 수필이라고 생각한다. 기쁜 날에는 기쁨을, 슬픈 날에는 슬픔을 고독한 자존심으로 삭여 승화시키면서 정제된 언어로 진솔하게 표현하고자 한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작업이다. 나를 찾는 일이며 나를 구원하는 일이다. 그리고 세상을 깊이 사랑하며 하루 하루의 삶을 깊은 사색으로 밀도 있게 살아가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2013-03-04 13:4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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