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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수필의 문학적 위상/김형진
이름
이상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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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문학적 위상 ①


김형진


- 수필문학의 새로운 지평을 생각하며

1. 수필은 문학의 한 장르이다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라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수필이 무엇이냐? 라는 물음에, 시, 소설, 희곡, 평론처럼
한 문장으로 대답하기가 어렵다. 그러다 보니, 소설이나 희곡이나
평론 이외의 잡다한 산문들이 '수필'이라는 명찰을 달고 세상을
활보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물론 이 지경에 이른 데는 수필의 역사적 배경이 작용한 일면을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역대 수필가들의
안이한 대처에도 있지 않을까 한다.

문학의 어떤 장르도 처음부터 일정한 양식을 갖추고 세상에
그 모습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고대의 시는 주문(呪文)에 지나지
않았고, 희곡 또한 제천의식(祭天儀式)에서의 대화에서 비롯되었고,
소설은 허무맹랑한 심심풀이 담화에서 시작하였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서구의 수필이 사상가의 여록(餘錄)에서
출발했고, 동양 수필이 선비들의 흥미 있는 신변잡기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런데도 유독 수필만이 아직도 흥미 위주의 신변잡기나, 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체험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학사의 흐름 속에서 시, 소설, 희곡, 평론이 각각 자기 부문의
변화와 성장을 계속해왔는데도, 유독 수필에서만 문학사적 흐름이
정체(停滯)된 상태에 있다.
수필에는 고전주의도, 낭만주의도, 사실주의도, 예술지상주의도,
모더니즘도 없다. 아직도, 문장이 유려하고 반듯한 생각을 조리 있게
써 놓으면 수필, 그것도 우수한 수필 행세를 하게 되었다.
이제 수필도 문학사의 흐름에 동참해야 한다.
수필도 장르적 특색을 정립하여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야 한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수필은 문학의 한 장르이다.
그것도, 장르 사이의 벽이 낮아지고 있는 현대문학의 특성을
고려할 때, 어느 문학 장르보다 미래가 밝은 문학 장르이다.
나아가 의식의 저변을 천착(穿鑿)하여 진실을 표출하려는 현대 문학의
시도는 수필에서 완성될 가능성이 짙다.

이제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수필의 문학적 위상을 정립하고,
수필의 문학적 기능을 극대화하여 현대문학이 추구하는 문학적 특성을
수용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는 일이다.

2. 수필에 대한 잘못된 인식

상식적인 이야기이지만 글은 실용적인 글, 일반적인 글, 학술적인
글, 문학적인 글로 나눌 수 있겠다. 실용적인 글은 국가적, 사회적,
가정적, 개인적인 문제들을 현실적인 입장에서 해결하는 데 쓰이는
모든 글이다. 일반적인 글은 대중에게 널리 알리고자 하는 사실을
정리하여 쓴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나 수기, 전기 등이며, 학술적인 글은 특정
분야의 학자가 자기 연구의 결과를 논리 정연하게 쓴 학술논문
등이며, 문학적인 글은 언어를 수단으로 사상과 감정을 표현한 시,
소설, 희곡, 수필 등이다.
때로는 구분이 모호한 글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이는 그 글을 쓴
목적이나 용도에 따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든다면 아무리 잘 쓴 전기도 소설이 될 수는 없으며,
수기나 신문 사설 또한 수필이 될 수는 없다.

흔히 '문학은 언어를 수단으로 하는 예술이다.' 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유개념(類槪念)은 '예술'이며, 종개념(種槪念)은 '문학'이고,
종차(種差)는 '언어를 수단으로 하는' 이다.
그러니까 문학은 미술, 음악, 무용으로 대별되는 예술의 한 갈래인데, 그 표현 수단이 언어라는 것이다.
예술은 인간이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창조적 능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세계를 구축해 가려는 줄기찬 노력에 의해서 이룩된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인간의 능력과 노력에 의해서 펼쳐내는 곧 인위적인
세계라 할 수 있다.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이고 문학이 예술의 한 분야라면 수필 역시
인위성을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은 아름다운 새소리가 음악이 될 수 없으며, 불타오르는
가을 산을 미술이라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예술품이란 얻어진 소재를 가지고 작가가 자기의 주관을 담아
형상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필이 있는 그대로의 것을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인 것으로 알고
있다면, 이는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요, 문학이 예술의 한 분야라는
엄연한 사실을 망각한 데서온 잘못된 인식이다.
이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지 않고는 수필의 위상은 영원히 미궁에
갇혀 있을 것이요, 당연히 수필의 미래 또한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우선 일반화된 수필에 대한 인식에 대하여 몇 가지 의문을
제시하려 한다.

(1)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인가?

수필(隨筆)이란 명칭은 중국 남송대(南宋代)에 홍매(洪邁)가 쓴
'용제수필(容齊隨筆)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수필이란 명칭을 쓰게 된 연유를 '나는 게으른 탓으로 책을
많이 읽지 못했으나, 그때그때 뜻한 바 있으면 앞뒤의 차례를 가려
챙길 것도 없이 바로바로 기록하여 놓은 것이기에 수필이라 일컫게
되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현대에 와서도 수필을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라 풀이하는 것은
아직도 약 800년 전 홍매에 머물러 있다 할 것이다.
그러면 소설의 경우를 한번 살펴보자.
소설(小說)이란 명칭은 중국 후한대(後漢代)에 반고(班固)가 쓴
'한서예문지(漢書藝文志)'의 '소설가자류 개출어패관 가담항설자
도청도설지소조야(小說家者流 蓋出於稗官 街談巷說者 道廳塗說之所造也)'에 처음 나오는 말이다.
이는 대강, 소설이라는 것은 패관들이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를 듣고
지은 것이라, 풀이된다. 그런데도 현대에 와서 소설을
'가담항설 도청도설'로 풀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있는 그대로(事實)를 쓰는 글'
이라는 풀이가 될 수 있다. 이는 앞에서도 언급한 바 수필이
문학예술의 한 장르임을 망각한데서 온 잘못된 인식이다.
여기서 한 가지 첨언할 것은 예술의 세계에는 사실(寫實)이 있을 뿐
사실(事實)은 없다. 문학에 있어서의 사실(寫實)은 실제처럼
베끼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실제처럼 느끼고 생각하도록 쓰는
것을 의미한다.

(2) 수필은 형식이 없는 글인가?

수필은 '무형식이 그 형식이다.' 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이 말을 대개 '형식이 없다.' 또는 '형식이 자유롭다.'로 풀이한다.
그러나 '없다'든 '자유롭다'든 이는 모두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형식이 그 형식'이란 말장난일 뿐 말이 되질 않는다.
'없다'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자.
이 세상 만물 중에 형식이 없이 알맹이만 있는 것이 정말 존재할까.
냇가에 핀 이름 없는 풀꽃 한 송이도 뿌리에서 나온 속잎이 자라 잎의
형태를 갖추고 줄기를 뽑아 올린 뒤에야 꽃봉오리를 맺는다.
뿌리가 없고 잎과 줄기가 없는 풀꽃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형식이 없으면 내용도 없다.

다음에는 '형식이 자유롭다.'라는 풀이이다. 이는 억지 해석이다.
'무형식'이란 형식이 없음을 뜻한다. 형식이 없음이 그 형식이란 말이
어떤 경로를 거쳐 '형식이 자유롭다.'로 풀이되는지 알 수 없지만,
십분 이해의 폭을 넓힌다해도 이는 궁색하기 짝이 없다.
형식이 자유롭기 때문에 시도, 소설도, 희곡도, 평론도 수용할 수
있다는 식의 이해가 정말 옳은 것일까.

그렇다면 서사시는 무어고, 소설 속에 나오는 시는 무엇이며, 극시는
또 무언가. 소설 속에 나오는 편집자적 논평은 어떻게 보아야하며,
언뜻 이론적이고 비판적인 글로만 보기 쉬운 평론이 문학의 한 장르로
자리를 굳히고 있는 건 또 어찌 보아야 하는가.
서사시를 우리는 소설이라 하지 않고, 소설 속에 시가 들어 있다 해서
소설이 시를 수용한다 하지 않으며, 극시를 희곡이라 하지 않고,
소설 속에 편집자적 논평이 있다 해서 소설이 평론이나 수필을
수용했다 하진 않는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수필은 일기도, 서간문도, 기행문도,
감상문도, 전기나 수기도 수용한다고까지 한다.
이 또한 수필의 문학적 위상을 흐려 놓는 중대한 오해이다.
일기는 일기요, 서간문은 서간문이요, 기행문은 기행문이다.
감상문도 전기나 수기도 마찬가지이다. 일기나 서간문이나 기행문의
형식을 빈 시나 소설은 얼마든지 있으며, 전기나 수기 형식을
빈 소설도 희곡도 있다. 그런데도 시, 소설, 희곡은 '형식이 자유롭다.' 하지 않는다. 수필은 수필이어야 한다.

(3) 수필은 고백의 문학인가?

사전에서 찾아보면 고백(告白)이란 '비밀이나 생각을 사실대로
털어놓는 것.'이라 풀이되어 있다.
이것이 수필을 '자기의 생각이나 느낌을 있는 그대로 쓰는 글.'이란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사실대로(있는 그대로)'의 해석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이는 앞에서 예술에는 사실(寫實)이 있을 뿐 사실(事實)은
없다고 언급한 바 있다.
현실 속의 사실(事實)도 작품 속에 들어오면 이미 사실(事實)은
아니다. 사실(事實)이란 재료를 가지고 작가가 창조력을 발휘하여
작품을 만들었을 때, 그것은 예술적(문학적) 사실(寫實)로
변용(變容)한다.

그렇다면 수필을 '고백의 문학'이라 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진실을 표출하는 데 가장 적합한 글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동감을 표하며, 나아가 수필이 내면의 진실을 천착해
내는 데 주력하는 현대문학의 중심을 차지할 수 있는 장르라 믿고 있다.

둘째는 화자(話者)가 '나(일인칭 주인공시점)'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이 경우 고백(일인칭 주인공시점)은 형식상의 문제이지
내용상의 문제는 아니다.
그러니까 '내(필자)'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것을 속내를
드러내듯이 쓰는 글이란 말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수필가가 쓴 작품 속의 것들을 사실(事實)로
받아들인다. 이 때문에 수필가는 글을 쓸 때 많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소설 같으면 자기의 신체적 비밀이나, 자기가 직접
행한 부적절한 남녀관계를 대리인을 내세워 말하게 하고, 행동하게
할 수 있으나 수필에서는 이게 자꾸 망설여진다.
이것이 수필의 변화를 가로막는 장애물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수필에서 추구하는 진실이 현실
그대로의 사실(事實)이 아니라 문학적 사실성(寫實性)에 기초함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4) 수필이 정말 선비의 문학인가?
수필을 '선비의 문학'이라 하는 것은 발상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선비의 문학'이란 말은 옛 선비들의 문집을 염두에 두고 끌어낸 듯
싶다. 그러나 옛 선비들의 문집이 다 수필적이진 않다.
오히려 선비들로부터 천대받던, 고려시대에는 패관잡기(稗官雜記)가,
조선시대에는 고문(古文)을 어겼다하여 유학자(儒學者)들로부터
지탄받던 잡기(雜記)가 훨씬 수필에 가깝다.
그러니까 선비가 쓰긴 했으나 선비의 글로 인정을 받지 못했던 글에서
수필은 시작하였다. 이규보의 '파한집(破閑集)'이 그러하고,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가 다 그러하다.
그리고 조선 후기의 명수필로 인정받는 규중칠우쟁론기
(閨中七友爭論記), 조침문(弔針文), 동명일기(東溟日記)는
모두 여류의 작품이다.
고전 속의 수필적인 글을 통해서는 수필이 '선비의 문학'이란 말을
수용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이런 잘못된 발상을 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고백의 문학'과 관계가 있는 듯하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수필은 대리 화자를 내세울 수 없는
글이라는 생각 때문에, 독자들은 수필 속에 나오는 말이나 행동은
수필가 자신의 말이요, 행동이라 단정한다.
그래서 '글은 곧 사람이다.'라는 말이 수필에 그대로
적용된다고들 한다.
문학 작품을 창작하는 사람들 중에서 수필가보다 더 독자를 의식하고
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부적절한 인간관계의 적나라한
묘사는 물론, 비어나 속어까지도 금기시(禁忌示)하게 되었다.
진실 표출을 염두에 두고 내세운 고백의 문학이 선비의 문학과
야합하면서 위선의 문학으로 둔갑해 버리는 폐단을 낳게 되지나
않을까 염려가 되는 대목이다.

(5) 수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가져온 부작용

보고, 듣고, 생각하고, 느낀 것을 그저 붓 가는 대로 쓰는 산문이
수필이고 보니, 어느 정도의 문장력만 있으면 누구나 쓰는 글이
되어 버렸다. 솔직 담백해야 한다느니, 점잖아야 한다느니,
약간은 웃음을 자아내게 할 수도 있고, 재치가 번득일 수도 있다느니,
하는 부수적인 요건이 있긴 하지만, 이거야 타 문학 장르에서뿐만
아니라 사람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도 그대로 적용되는 요건이 아닌가.
오히려 이러한 요건들에 대한 집착은 수필의 정체(正體)를
모호케 하여 문학의 한 장르로서의 수필의 위상(位相)을 흔들어
내리는 데 한 몫을 하고 있다.

타 장르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숙련된 문장으로 포장한 체험담이나
편상(片想)들을 수필이란 명찰을 붙여 세상에 내어놓아 활보하게
한다든지, 음악, 미술, 연극, 철학, 사회, 정치, 경제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쓴 문학예술과는 거리가 먼 여록(餘錄)들이 버젓이
수필(에세이) 행세를 한다든지,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연예인이
쓴 재미있는 이야기가 잘 팔리는 수필 노릇을 한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은 수필을 쓰지 않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선 수필이 독립된 문학예술의 한 부문임을 인식해야하며,
수필에 대해 열정을 갖고 고민을 거듭한 뒤 수필다운 글을 써야한다는
말이다.
타 분야나 타 부문에 종사하는 사람이 그저 행과 연을 갈라 리듬을
만든 시답지 않은 글을 신문이나 잡지, 또는 단행본으로 발표했을 때
시인들의 반응은 어떠하겠는가.
도저히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왜 수필에서는 그런 일이 용납되는가 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 이유는 명백하다. 유독 수필만이 정체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수필의 참모습을 찾는 노력이 필요한 때이다.


2014-02-02 22:4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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