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board

 
제목
축복
이름
權奇薰 [ E-mail ]
홈페이지
http://cafe.daum.net/HELS
첨부화일

축복




권기훈

















멀리 한적한 비포장 길에 버스 한 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다.
그때, 수수한 한복차림에 코트를 걸쳐 입은 숙경이 의료 가방을 옆에 놓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버스가 가까워져 온다. 숙경이 손을 든다. 버스가 멈추고 숙경이 오르고 버스 떠난다.




숙경이 빈자리를 찾아온다. 육군 대위 복장의 동욱은 예사롭게 자리를 비켜주고, 숙경은 창 측에 앉는다.

버스가 달려온다. 검문소의 헌병이 버스를 세운다. 헌병이 버스에 올라 경례를 한다.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동욱 앞에 와서 다시 경례한다.
“신분증 좀 보겠습니다!”
동욱이 신분증을 꺼내 주었다. 그때, 옆자리에 앉아있던 숙경도 급히 뭔가를 찾고 있었다.
“휴가 가시는 길이시군요?”
동욱은 끄덕였다. 숙경도 신분증을 내밀었다. 그러나 헌병은 동욱의 신분증을 돌려주고는 경례한다.
“다녀오십시오!”
하고 나갔다. 숙경은 무안한 듯 동욱을 보았고, 동욱은 예사롭게 씩 웃었다. 그러나 숙경은 당황한 듯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창밖을 보았다. 순간, 동욱은 숙경이 어디서 본 듯하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헌병이 내리고 신호를 하자 버스는 다시 출발했다.

동욱은 여전히 숙경을 보고 있었고, 숙경의 무료한 시선이 차창에 머물렀다. 동욱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숙경도 동욱을 보았다.
“……?”
“어디서 많이 뵌 듯합니다만……?”
“어디서죠?”
“혹……?”
“한 때 군 의료원에 근무한 적이 있어요.”
동욱은 기억이 살아났다.
“아, 군의!”
숙경도 눈빛이 반짝했다.
“중위님! 아니, 그동안 대위님이 되셨군요.”
둘은 곧 회상에 잠기었다.

동욱은 군 의료원 병실 침대에 환자로 누워 있었고 하얀 가운의 숙경(군의)은 동욱을 살펴보며 기록부에 뭔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그때, 동욱의 시야에 천사 같은 숙경의 모습이 밝게 다가왔다가 다시 천천히 흐려져 갔다.

고갯길에 와서 멎는 버스가 흙먼지를 남겨 놓고는 다시 출발했다. 흙먼지 속에 숙경의 모습이 자세해졌다.

동욱은 멀어져 가는 버스 안에서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숙경도 손을 흔들어 주고 있었다.
그때, 동욱의 눈에 기억의 복선처럼 나환자촌의 이정표가 보였고, 멀리 환자촌이 보였다. 그 모습이 까마득히 멀어졌고, 동욱은 아쉬운 듯 돌아앉다가 문득 뭔가를 보았다. 바닥에 숙경의 신분증이 떨어져 있었다. 동욱은 신분증을 집어 들었다. 순간, 뭔가를 예감하는 듯한 동욱 위에, 라디오에서 '만남'의 전주곡이 흐르고 있었다.

동욱이 고향 집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한복차림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한걸음에 나와서 동욱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 아버지!”
어머니 눈에는 육군 대위 계급장의 외아들이 믿음직하고 자랑스럽게 보였다.
“그래, 고생 많았제? 니 온다는 소식 듣고, 곶감 떡 해 놓고 울매나 기다렸는지 니 아나? 이제나저제나 하다가 눈이 다 빠질라꼬 안 했나…….”
아버지는 의례처럼 어깃장을 놓았다.
“임잔 나라에 충성하는 다 큰 자석 뭐할라꼬 그래 기다렸노? 내사 마 하나도 안 보고 싶더구먼…….”
“아이고, 코에 혀 한번 대 보소. 내보기엔 영감은 밤새도록 뭐 마려운 뭐 맹키로 뒷간을 들락거리더니 만 서도…….”
“아니 임자, 시방 뭐 마려운 뭐라 캤노?”
동욱은 웃으며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싸움을 말렸다.
“그만 들어가시죠. 절 받으셔야지요.”
“아무렴 그래야제, 그래야 하고 말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동욱의 절을 받으며 흐뭇한 표정이었다.

숙경은 아버지(나환자)를 엎드리게 하고, 등창 같은 환부를 치료하고 있었다.
“이번에 새로 나온 약인데 약효가 좋지요, 아버지?”
“에그 시원타……. 니 손이 약손이다……. 하지만 이제 너랑은 그만 찾아왔으면 좋겠구나…….
병원 일 보랴, 일요일마다 나 같은 환자들 찾아다니랴, 얼마나 바쁠 거야……. 그러다가 너 시집도 가기 전에 다 늙는 거 아닌지 모르겠구나…….”
“아이 참 아버진 저 보고 의사 공부해서 아픈 사람 돌보라고 하신 분이 누구 신데 그러세요?”
“그렇다고 기껏 아비 병 고쳐 달라고 의사 공부하란 말은 안 했다 난…….”
“전 시집 같은 건 생각해 본 일 없어요. 이 세상에 아버지 같은 분들이 계시는 한은 시집 안 갈 거예요.”
“아비 병 고칠 생각 말고 너 시집부터 가거라. 그게 효도하는 거다.”
“그래요. 저 시집가는 거 보시려거든 어서 병이나 나으세요. 그리고 어머니께 편지 자주 해 주시고요. 어머닌 아버지 편지 받아 보시는 게 유일한 희망이라는 거 아버지께서도 잘 아시잖아요.”
“쯧쯧……, 딱한 사람 같으니…….”

동욱은 편지 봉투에 적힌 주소를 묻고, 행인이 가리키는 곳으로 갔다.

어느 아파트 현관 앞에 찾아오는 동욱은 잠시 망설이다가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누나야?”
하고 문이 열리었고, 현이가 고개만 쏘옥 내밀었다. 동욱은 약간 실망한 듯 말했다.
“얘, 꼬마야.”
“꼬마가 뭐예요?”
“그래, 미안하다. 네 이름이 뭐니?”
“현이에요.”
“현이……. 그래 현아, 말 좀 물어보자.”
“뭐든지 물어보세요!”
“누나 계시니?”
“왜 그러세요? 누나하곤 어떻게 아시는 데요?”
“음……, 인연……. 그렇지, 인연이 있는 사람이란다.”
“인연이 뭔 데요?”
“이럴 테면 거리에서 옷깃을 스친 사람이랄까……?”
현이는 갸웃하며 말했다.
“이상하군요? 하여튼 들어와서 기다려 보세요. 곧 돌아오실 거예요.”

현이와 동욱은 거실로 들어왔고, 김 여인은 방에서 나오다가 물었다.
“누구 신지?”
“저…….”
“글쎄, 누나하고 거리에서 옷깃을 스쳤다나 어쨌다나…….” 김 여인은 의연히 보았고, 동욱은 정중히 거수경례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한동욱이라고 합니다.”
김 여인은 보다가 속으로 믿음이 간다는 듯 말했다.
“앉으시지요.”
그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동욱과 현이는 소파에 앉았다.
“아저씨.”
“왜?”
“수영할 줄 아세요?”
“그건 왜 묻지?”
“누나가 수영복 사오기로 했거든요.”
동욱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상하지 못한 채 그냥 수긍한다는 듯 끄덕였다.
“응.”
“누나가 수영복 사오면 수영 가르쳐 주실래요?”
“응. 그러지.”
무슨 속셈인지 선선히 대답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누나다!”
현이가 발딱 일어나 뛰어 나갔다.

현이가 현관문을 열고 막 뛰어 나가려는데, 집배원이 편지를 내밀었다. 현이는 실망은 했지만,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세요?”
“잘 있었니?”
“네. 고맙습니다.”
집배원은 가면서 작별인사를 했다.
“그래. 잘 있어라.”

현이는 편지 두 통을 들고 들어왔고, 김 여인은 과일 접시를 들고 와서 소파에 놓고 앉았다.
“어머니, 아버지의 편지예요. 이건 어머니 꺼, 이건 누나 꺼.”
김 여인은 반가운 듯 편지를 받았다.
“근데 어머니…….”
김 여인은 현이를 보았다.
“아버진 왜 편지만 보내시고 한 번도 안 오시는 거예요?” “아버진 바쁘시단다.”
“전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잖아요.”
“그야 모를 수밖에……. 네가 아주 어렸을 때 먼 곳으로 가셨으니까.”
“그곳이 어딘 데요, 어머니?”
김 여인은 슬그머니 일어서며 말했다.
“음. 아주 먼 곳이란다.”
동욱은 의아한 눈길로 김 여인을 보았고, 현이는 젖먹이처럼 보채었다.
“그곳이 어딘데 그러세요? 말해도 전 모르는 곳이에요? 네, 어머니?”
“이 담에 네가 어른이 되면 알게 된단다.”
그리고 동욱에게 말했다.
“과일 드세요.”
그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현이는 볼 멘 소리로 말했다.
“난 아버지가 보고 싶은데 아버진 내가 보고 싶지도 않으신가 봐…….”
동욱은 더욱 의아한 눈길로 김 여인과 현이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숙경의 방으로 들어온 김 여인은 화장대 앞에 앉아 편지가 가득 꽂혀 있는 꽃바구니의 맨 앞쪽에 편지를 예쁘게 꽂아 놓았다.
그리고 사랑을 담은 눈으로 백의의 천사 같은 숙경의 사진을 보며 살며시 눈인사하고 일어서 나갔다.

자기 방으로 들어온 김 여인은 편지가 가득한 꽃바구니와 숙경 아버지의 건강한 사진 앞에 앉았다. 그리고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동욱과 현이는 친숙한 사이처럼 얘기하며 과일을 먹고 있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리었다.
“누나다!”
현이가 달려나갔다. 숙경은 쇼핑 가방을 들고 들어오다가 동욱을 보고는 놀라는 눈치였다. 그리고 그의 표정엔 왠지 모를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것 같았다.
“누나, 내 수영복 사 왔어?”
현이는 가방을 받아 들었고, 동욱은 정중히 거수경례했다.
“안녕하십니까, 숙경 씨?”
“오셨군요‥”
겨우 고개를 숙이며 움츠러드는 듯했다.
“숙경 씨의 편지 고마웠습니다.”
“죄송해요, 답장이 늦어서…….”
“아닙니다. 비록 답장은 늦었지만, 유익한 말씀을 많이 쓰셨더군요. 병영생활에 여간 큰 활력소가 되었던 게 아니랍니다.”
숙경은 주위를 의식하며 말했다.
“저 우리 나가시죠‥”
“그런데……, 숙경 씨는 하나도 반갑지 않으신가 보군요?”
“죄송합니다‥”
그때, 현이는 한 손에 수영복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동욱의 손을 잡아당겼다.
“아저씨, 우리 수영하러 가요. 네, 아저씨…….”
“응. 그래……, 그러자꾸나…….”
숙경의 손도 잡아당겼다.
“누나도 같이 가……. 응, 누나…….”
숙경은 난처했다.
“그러시죠. 손님을 쫓아내려면 주인도 함께 나가는 게 좋은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그제야 숙경은 피식 웃었고, 현이에게 말했다.
“누나 옷 갈아입고 나갈게. 먼저 가‥”
“와! 신 난다! 아저씨, 어서 가요!”
동욱은 현이에게 끌려나가며 자꾸만 숙경을 돌아보았고, 숙경은 안으로 들어가며 예의 김 여인에게 인사말부터 전했다.
“어머니, 저 왔어요.”
김 여인은 안에서 말했다.
“그래, 수고했다. 손님하고 쉬어라.”

숙경은 방에서 수영복 차림으로 편지를 읽고 있었다. 그러다가 편지를 펼쳐 둔 채 블라우스를 입고 나갔다.

김 여인은 편지를 다 읽고 봉투에 넣어 곱게 꽂아 놓고 거실로 나갔다.

김 여인은 거실로 나와서 발코니 쪽으로 갔다. 발코니에서 본 둑길을 걸어가고 있는 현이, 동욱, 숙경의 즐거운 모습……. 김 여인은 흐뭇하게 보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한 편으로는 염려스러운 듯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둑길을 걸어오는 세 사람……. 멀리 강물, 수영장에 수영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현이는 앞서가며 말했다.
“아저씨, 빨리 와요! 누나도! 수영복은 저기 가서 빌리면 돼요! 아저씨하고 누나하고 누가 누가 잘하나 우리 셋이 시합해요.”
하고 달려가고 있었고, 동욱과 숙경은 즐겁게 웃으며 걸어가고 있었다.

아이들이 천진하게 수영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과 수영을 배우고 있는 현이가 보였다.
현이는 서툴게 헤엄쳐 오다가 그만 깊은 곳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그때, 헤엄쳐 오던 동욱과 숙경은 현이를 구해 주고, 현이의 손을 잡고 자상하게 수영을 가르쳐 주며 헤엄쳐 갔다.
어느덧 현이의 발놀림이 경쾌해지고 있었다. 동욱은 조금은 안심되는 듯 손을 놓아주었다. 현이는 아직은 서툴렀지만, 혼자 힘으로 이를 악물고 헤엄쳐 가고 있었고, 동욱과 숙경은 현이의 좌우에서 따르며 주의를 시키고 있었다.
그때, 먼 하늘에 먹구름이 보였고…….

세 사람은 황급히 둑길을 달려오고 있었다. 그 하늘에 천둥과 번개가 치고, 순식간에 소나기가 쏟아졌다. 그들은 비를 흠뻑 맞으며 달려가고 있었다.

동욱은 숙경의 방, 침대 위에 알몸으로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때, 숙경은 욕실에서 동욱의 군복을 손빨래하고 있었다.

동욱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경대 앞 꽃바구니의 편지를 보고는 경이롭다는 듯 입을 벌리었다.
그리고 숙경이가 그대로 펼쳐 둔 편지를 보고는 슬며시 이불을 쓴 채 다가가 집어 보았다.
구불구불하게 구술(입)로 쓴 편지였다. 동욱은 겨우 알아보고 읽었다.
“사랑하는 딸에게…….”
동욱은 편지를 보다가 슬그머니 생각에 잠기었다.

백의의 천사 같은 숙경과 휠체어를 탄 동욱의 정겨운 회상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거실을 지나던 현이가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숙경의 방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현이가 장난스럽게 살며시 방문을 열고 쏘옥 들여다보았고, 동욱은 그것도 모르고 편지를 보고 있었다.
“뭐하시는 거예요?”
놀란 동욱은 편지를 던져 놓고는 침대 위로 올라가 다시 이불을 둘러썼고, 현이는 혀를 날름 내밀었다.

그때, 김 여인이 나오다가 현이를 보고는 나직이 불렀다.
“현아!”
현이는 기겁하고 돌아다봤다.
“어른을 놀리면 못 써!”
“잘못했습니다, 어머니…….”
현이는 슬그머니 제 방으로 들어갔고, 김 여인은 빙긋이 웃고는 발코니 쪽을 보았다.
숙경은 발코니에서 동욱의 군복 빨래를 말리고 있었다.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이었다.
김 여인은 또 빙긋이 웃었다. 그러나 김 여인은 다음 순간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만남'의 전주곡이 슬그머니 기어들었다.
그것도 모르고 부지런히 빨래를 만지며 널고 있는 숙경은 마냥 즐겁기만 했다.

병원 앞에 지프가 서 있었고, 동욱은 운전석에 앉아 숙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숙경은 외출복 차림으로 나왔고, 동욱은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숙경은 와서 옆자리에 앉았다.
강물 속에 지프를 타고 달리는 동욱과 숙경의 실루엣이 보였다.

숙경은 부대 앞에서 시계를 보며 기다리고 있었고, 그때, 동욱이 뛰어 나왔다.
두 사람은 나란히 손을 잡고 정겨운 모습으로 걸어갔다.

숙경은 영외 하숙방에서 청소하고 있었다. 사뭇 즐겁기만 했다. 그때, 동욱은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며 숙경을 나오라고 손짓을 했고, 숙경은 안 된다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동욱은 군홧발로 들어가 숙경을 끌어내었다.

동욱과 숙경은 손을 잡고 강둑길을 달려왔다. 숙경은 동욱의 가슴을 때렸다. 두 사람 모두 숨차게 헐떡이고 있었다. 그리고 의연해지며 나란히 걸었다.

숙경과 동욱은 나란히 와서 강둑에 앉았다. 노을에 비친 강물이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숙경이 시를 읊었다.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없는 하늘을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며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노을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려는
약한 등불입니까…….

동욱은 그윽한 눈으로 보며 불렀다.
“숙경 씨…….”
“동욱 씨…….”
“숙경 씨는 저 노을빛보다 더 아름다운 나의 천사요.”
“아이 좋아라.”
그러나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며 말했다.
“하지만 전 다만 평범한 여자일 뿐인 걸요‥ 아니, 어쩌면 그 이하일지도 몰라요‥ 언젠가 실망하실 지도 모를 일이에요‥”
“왜 그래요, 숙경 씨?”
“아니에요‥”
“부모님께서 숙경 씨를 만나 보자고 어찌나 성화하시는지…….”
숙경은 당황하며 말했다.
“아니, 저 같은 게 어찌…….”
“……?”
동욱은 그런 숙경을 의혹의 눈으로 보고 있었다.

동욱과 숙경은 선물 꾸러미를 들고 고향 집을 찾아오고 있었다. 삽살개가 반갑다고 짖었고, 아이들이 따르고 있었다.

동욱과 숙경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절을 하고 앉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대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침이 마르도록 혀를 내둘렀다.
“아이고, 참하기도 해라……. 니 어데서 요렇게 깎은 밤 같은 며느릿감을 구해 왔노?”
아버지는 면구한 듯 헛기침을 했다.
“흠……, 흠……. 내 아들은 깎은 밤 아니면 아예 껍질도 안 깎은 밤인 게지…….”
어머니는 숙경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래, 양친 부모님은 다 계시고?”
숙경은 다소곳이 말했다.
“네‥”
“나이는?”
숙경은 긴장한 탓인지 머뭇거렸다. 그러자 동욱이 대신 말했다.
“저하고 같습니다.”
어머니는 입을 딱 벌리며 말했다.
“처녀 나이가 하마 서른이란 말이냐?”
“네.”
“그런 데도 여태까지 시집도 안 가고 뭐 했단 말이고?”
“그건 지난번에 다 말씀드리지 않았어요, 어머니…….”
어머니는 슬며시 돌아앉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무슨 탈이 없다면 조렇게 참한 색시가 왜 여태 시집을 안 갔단 말이고……? 안 간 건지, 못 간 건진 모르지만 서도…….”
“아니, 여보 임자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노”
어머니는 못할 말을 한 듯 입을 막으며 말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라요‥ 이가 빠져서 마 말이 헛나왔나 보아요‥”
동욱은 면구한 듯 말했다.
“아니, 참 어머니도…….”
하고 숙경의 눈치를 보았다. 그때,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의혹의 눈이 되었다.
믿었던 동욱마저 그런 표정을 짓자 숙경은 확실히 당황하는 눈치였고, 동욱의 생각은 영상처럼 떠올랐다.

숙경은 화장대 앞 스탠드 밑에서 편지를 쓰다가 문득 불길한 생각에 잠기었다.

그리고 숙경의 아버지는 소반 위에 편지지를 펴놓고 입에 연필을 물고 편지를 쓰고 있었다. 두 손은 문드러졌지만 의연하기만 했다.

김 여인 역시 화장대 앞에서 편지를 쓰다가 뭔가를 생각하고는 일어서 나갔다.

김 여인이 숙경의 방으로 들어왔다. 숙경은 여전히 불길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김 여인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고, 이윽고 숙경은 김 여인을 돌아보았다.
김 여인이 말없이 다가앉았고, 숙경은 울듯이 말했다.
“어쩌면 좋아요, 어머니……?”
김 여인은 숙경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말 안 해도 네 맘 다 안다‥ 하느님의 뜻에 순응하기로 하자‥”
숙경은 김 여인에게 안기었다.
“어머니…….”

동욱과 숙경은 금은방 앞에서 기웃거리다가 안으로 들어갔다.

동욱은 주인과 얘기를 주고받으며 주인이 내주는 반지를 차례로 숙경의 손가락에 끼어보고 있었다.

분위기 그윽한 연회석을 마련하고 동욱,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숙경, 김 여인이 둘러앉아 조촐한 약혼식을 하고 있었다.
모두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동욱은 숙경에게 반지를 끼워 주고 있었다.

동욱과 숙경은 식장을 예약하기 위해 예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드레스를 둘러보며 고르고 있었다.

숙경은 자신의 방에서 드레스 차림으로 거울에 자기의 모습을 비쳐 보며 들떠 있었다. 밖을 향해 말했다.
“엄마! 나 어때요? 어울리는 거 같아요? 이렇게 황홀한 드레스를 예전엔 왜 입어 볼 생각도 못 했는지 몰라요.”
“너 말하는 게 마치 드레스 입어 보려고 시집가는 사람 같구나!”
“아이 참 엄만.” 하고 불만스럽게 밖 쪽을 보다가 서둘러 나갔다.

숙경이 드레스를 끌며 거실로 나왔다. 김 여인은 혼숫감을 잔뜩 늘어놓고, 품목을 확인하며 정리하고 있었다.
숙경은 김 여인 앞에 와서 보란 듯이 사뿐히 자세를 취해 보였고, 김 여인은 무심히 보다가 눈이 둥그레졌다.
“어떠세요? 이렇게 입으니 나도 꽤 괜찮죠?”
김 여인은 부러운 눈으로 말했다.
“꽤 괜찮은 게 다 뭐냐…….”
“부러우시죠, 엄마?”
김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한 번 입어 보고 싶구나…….”
숙경은 그만 가슴이 뭉클해졌다.
“벗을게 엄마 한 번 입어 보실래요?”
“아서라……, 다 늙어 쭈그러진 꼴에 드레스가 해당하기라도 한단 말이냐…….”
“죄송해요, 어머니…….”

동욱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혼수준비에 부산했다. 그때, 동욱이 들어왔다.
“아버지, 어머니, 저 부대에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어여 가 보거라.”
“네.”
하고 나가려는데, 어머니가 불렀다.
“야야, 동욱아.”
“예, 어머니?”
“근데 말이다. 내 이 말은 안 할라꼬 했다만, 아무래도 머리가 근지러워서 꼭 해야겠다.”
“무슨 말씀인지요?”
“니 아부지하고도 방금 말했다만 암만 생각해도 색시가 니 하고는 안 어울리는 기라.”
아버지도 그렇다는 듯이 끄덕였다.
“만에 하나 안 그렇길 바래는 에미 맴이지만 서도…….”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인석아, 옛날부터 가문보고 사둔 하는 풍습이 괜한 풍습인 줄 아느냐? 내사마 아무래도 토째비한테 홀린 기분인 기라…….”
“그래, 그건 니 어미 말이 맞다. 지끔도 늦지 않았으니 알아볼 건 알아보는 게 순서가 아니겠나…….”
동욱은 문득 생각에 잠겼다.

잠든 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는 숙경의 모습이 마치 어머니와 자식처럼 보였다.

“야야, 동욱아, 니 시방 뭔 생각하고 있노?”
동욱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이고, 야가 뭣에 홀려도 단단히 홀렸구먼…….”

동욱은 콧노래를 부르며 숙경의 아파트를 찾아오고 있었다. 동욱이 초인종을 눌렀다. 그때, 집배원이 와서 편지를 주고 갔다. 동욱은 무심히 편지의 주소를 보다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의혹에 사로잡혔다.

현이가 편지를 들고 들어 와서 아버지의 편지라고 자랑하던 생각―
동욱이 숙경의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쓴 채 몰래 편지를 보던 생각―
동욱이 버스에서 숙경과 나환자촌을 바라보던 생각―

현실의 동욱은 더욱 불길한 생각으로 다시 편지의 주소를 확인하더니 급히 어디론가 뛰어갔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나오는 숙경은 달려가는 동욱을 보며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했다.

버스가 비포장도로를 달려가고― 헐떡이며 고갯길을 오르는 동욱은 나환자촌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보고, 다시 편지의 주소를 확인하며 망연자실 바라보았다.

숙경과 김 여인은 시집 식구들의 명부를 열거하며 혼숫감을 확인하고 있었다. 그때, 철없는 현이는 떼를 썼다.
“내 꺼는 없어요? 내 꺼는 없어?”
하며 보채었고, 김 여인은 조용히 타일렀다.
“이건 누나가 시집 식구들한테 새 식구가 되었으니 예쁘게 봐 주세요. 하는 뜻으로 정성을 담은 마음의 선물이란다.”
라고 말하자 현이는 그만 시무룩해졌다.

동욱은 힘없이 영외 하숙방에 들어와서 벽을 기대고 앉았다. 편지를 꺼내어 읽다가 찢어 버렸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 듯 벌떡 일어나 창 쪽으로 가서 밖을 보다가 돌아서며 괴로움에 머리를 쓸어안고 무너졌다. 수화기가 내려진 전화기가 보인다.

김 여인은 여전히 혼숫감을 정리하고 있었고, 숙경은 연거푸 전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통화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이윽고 숙경은 수화기를 놓고, 김 여인에게로 다가왔다.
“왜 통화가 안 되니?”
“하숙방엔 수화기를 내려놓았는지 받지도 않고, 부대에선 무슨 일인지 본인이 외부 전화는 안 받겠다고 한대요.”
“한 서방이 직접 와서 양복도 맞춰야 하고, 할 일이 많은데 전 같으면 그 새 몇 번은 다녀가도 갔을 텐데, 이상한 일이구나…….”
“그러게 말이에요.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나 봐요.”
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부대에 바쁜 일이 생긴 게지.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니.” 숙경은 외출복을 입고 나왔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제가 가보고 올게요.”
“아직 날짜도 충분한데 좀 더 기다려 보잖고선…….”
“다녀오겠어요, 어머니.”
하고 서둘러 나갔다.
김 여인은 뭔가를 느낀 듯 기도하는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해 질 무렵, 동욱은 부대에서 천천히 앞만 보고 걸어 나오고 있었는데, 숙경이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동욱은 여전히 앞만 보고 지나쳐 가고 있었다. 숙경은 더욱 이상하다는 듯 멈칫멈칫 따라갔다.

동욱은 영외 하숙방에 등을 보이고 서 있었고, 숙경은 조심스레 다가서고 있었다.
잠시 후 동욱은 무서운 눈으로 돌아봤다. 그의 손이 허공을 갈랐고, 숙경이 쓰러졌다. 동욱은 노려보며 말했다.
“위선자! 숙경인 두 얼굴을 가진 위선자란 말이요! 겉으론 천사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 속으론 악마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겠지?”
숙경은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내 말이 부당하다면 고개를 들어보란 말이오!”
숙경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걸 보면 그래도 양심은 남아 있는가 보군요?”
동욱은 숙경 앞에 편지를 던져 놓았다. 숙경은 말없이 편지를 보았다.
“입이 있으면 말을 해 보란 말이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속이며 살아왔는지?”
숙경은 비감한 눈으로 동욱을 올려다봤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어보겠소! 현이는 누구요?”
숙경은 더는 듣고 싶지 않은 듯 절망의 몸짓으로 귀를 막았다.
“대답을 해 보시오! 호적에도 없는 현이는 누구의 자식이란 말이요?”
이윽고 숙경은 몸부림하며 뛰어 나갔다. 쏘아보던 동욱은 괴로움에 머리를 쓸어안고 괴로워했다.

숙경은 몸부림하며 저녁 무렵의 강둑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이윽고 동욱은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간, 불길한 예감을 느낀 듯 벌떡 일어나 뛰어 나갔다. 강둑길을 달려오는 동욱은 어둠 속을 향해 숙경이를 외쳐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강 하구 쪽으로 뛰어갔다.

지친 모습으로 비틀거리며 강 하구에 나타난 동욱은 강 쪽을 응시하며 절망에 가까운 울음을 울고 있었다.

자정이 지나서야 숙경은 비에 젖은 모습으로 거실에 들어왔고, 김 여인은 놀란 듯 따라 들었다.
“숙경아 네가 이게 웬일이냐? 무슨 일이야?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이냐?”
숙경은 말없이 손에서 반지를 뽑더니 소파에 던져 놓고 방으로 들어갔다.
김 여인은 더욱 놀란다. 그리고 따라 들었다.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엎드리는 숙경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김 여인은 어이없어하며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끝났어요‥ 다 끝났어…….”
“기어코 올 것이 왔구나……, 올 것이 왔어…….”
김 여인은 숙경을 끌어안고 울기 시작했다.
잠시 후 김 여인은 고개를 들고 허공을 보았다. 그리고 아픔을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아파트 앞에 급히 나타나는 동욱은 초인종을 눌렀다. 현이가 문을 열어 주었다.

동욱은 거실로 들어왔다. 소파에 편지와 반지가 놓여 있었고, 김 여인은 발코니 쪽, 창밖을 보고 있었다.
동욱은 다가서며 말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왜 진작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단 말입니까?”
김 여인은 그대로 말했다.
“말한다고 사실이 달라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아니, 장모님?”
“난 자네 장모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네…….”
“그럼 숙경 씨의 친어머니가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말해도 자넨 이해 못 할 걸세.”
“장모님까지 저를 속일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숙경인 내가 낳은 아인 아니지만 내 자식인 것만은 사실이라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다 말하겠네…….”
“속 시원히 말해 주십시오!”
“요즘 사람들은 사랑이란 말을 너무 흔히들 쓰더구먼……. 하긴 나 역시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으니 쓰긴 하겠네만.”
동욱은 초조히 보고 있었다.
“그 애 아버지와 난 이럴 테면 정신적인 사랑을 했다네.” 동욱은 여전히 보고 있었다.
“우린 비록 서로 떨어져 있지만, 지금까지 서로의 마음을 믿어 왔네……. 그러면서 때로는 믿음이 약해질 때면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곤 했다네…….”
동욱은 여전히 보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자네한텐 숙경의 일이 더 궁금하겠지.” 동욱은 더욱 초조하게 보고 있었다.
“숙경이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다네…….”
“그렇다면 현이는 누굽니까?”
“그 아이 역시 불쌍한 아이라네……. 언젠가 문밖에 버려진 핏덩이가 있었다네……. 숙경의 심성을 아는 사람의 소행으로 생각되네만……. 언젠가는 나타나 주리라 믿으며 오늘까지 키워 왔다네…….”
“믿을 수가 없습니다!”
동욱은 돌아섰고, 김 여인은 이윽고 돌아보며 말했다.
“자네한테 전해 줄 게 있네…….”
동욱은 나가려다가 다시 돌아보았다. 김 여인은 소파에서 편지와 반지를 집어 주었다. 동욱은 반지를 받았다.
“나로선 사실을 말했을 뿐이니 믿고 안 믿고는 자네가 알아서 할 일이라고 생각하네…….”
동욱은 쏘아보다가 휙 나가 버렸고, 김 여인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해 눈을 감았다. 그 눈에서 비수 같은 눈물이 떨어져 바닥에 꽂혔다.

버스가 비포장길을 달려갔다. 그리고 동욱은 헐떡이며 고갯길을 달려 오르고 있었다.

동욱은 숙경 아버지의 방문을 와락 열고 들여다봤다. 숙경은 아버지를 치료하고 있었다.
잠시 후 무표정하게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치료를 계속했다.
동욱은 아직도 당혹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숙경의 아버지는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바깥 날씨가 몹시 사나운가 보구나.”
“네, 아버지…….”
숙경은 동욱에게 말했다.
“문 좀 닫아 주시죠.”
동욱은 문을 닫아 버렸다.

동욱은 비포장 가로수 길을 따라 생각에 잠긴 채 걸어오고 있었다.
'만남'의 배경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숙경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릴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요? 미감아라고 해요. 나병균에 감염되지 않은 아이란 뜻이죠. 의학이 증명해 주는 세상인 데도 아직도 사람들은 우릴 꺼림칙하게 생각해요. 사람들이 우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한 우린 그 사람들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거죠.”

고갯길에 의료 가방을 멘 숙경이 생각에 잠긴 채 걸어오고 있었고, 숙경의 독백이 하염없이 눈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제일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알아요? 그건 바로 사랑이에요. 나병균에 감염되는 것만큼이나 세상의 혼돈 된 사랑에 감염되는 것 또한 두려워해요.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 미감아들이에요. 참다운 사랑을 느껴 보지 못한 미감아들이죠.”

생각에 잠긴 채 강둑길을 걸어오는 동욱의 어깨 위에도 숙경의 독백이 흐르고 있었다.
“제가 알고 있는 사랑이란 나병균 같은 무서운 병균에 감염되는 것마저도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것으로 생각해요. 그런데 동욱 씨는 그럴 자신 있어요? 동욱 씨 자신은 그런 사랑을 줄 수 없으면서 상대방에게만 완벽한 사랑을 바란다는 건 모순이잖아요?”

생각에 잠긴 채 비포장 길을 걷고 있는 숙경의 모습 위에 ‘만남'의 음악이 흐르고 다음 장면들을 타고 흘렀다.

동욱은 영외 하숙방에 들어와서 창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 채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김 여인은 화장대 앞에 앉아 손가락이 굵어져 벗을 수 없게 된 반지를 만지며 애환에 젖어 있었다.

숙경은 반지가 없는 손을 허전하게 보고 있었다.

동욱은 영외 하숙방에서 괴로운 모습으로 편지와 반지를 만지고 있었다.

그리고 수개월 후 동욱과 숙경은 마치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마주친 사람들처럼 서먹하게 어느 공원에서 발길이 멎었다.
한동안 말이 없었다.
숙경은 눈이 푸석했고 동욱은 애써 밝은 표정으로 숙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숙경은 외면한 채 말했다.
“왜 만나자고 했어요?”
동욱은 여전히 응시하고 있었다.
숙경은 움직여 가며 말했다.
“모든 건 끝났어요. 길에서 우연히 옷깃을 스쳐 가는 뭇 사람들처럼 우리 그렇게 제 갈 길을 찾아 기기로 해요.”
이윽고 동욱은 다가서며 입을 떼었다.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어디 있겠소?”
숙경은 무슨 말이냐는 듯이 쏘아봤다.
“다만 있다면…….”
“변하지 않는 게 없는 세상이라면 결국 사랑도 변한다는 뜻인 가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럼 무슨 뜻이죠?”
숙경은 뜻밖이란 듯이 똑바로 보았다.
“황금이 자연 그대로 있을 때 순수한 황금인 것처럼 사랑도 맹목적일 때만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숙경은 여전히 보고 있었다.
동욱은 군인다운 정중함으로 말했다.
“용서하십시오. 나 역시 숙경 씨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사실을 건성으로만 알았습니다.”
숙경은 여전히 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순수한 사랑일 지라도 어떻게든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숙경은 여전히 보고 있었다.
“역시 우린 평범한 사람일 수밖에 없는가 봅니다.”
숙경은 감동된 눈으로 보았다.
“어차피 평범한 사람일 바에야 우리 한 번 평범한 사람답게 살아봅시다.”
숙경은 글썽한 눈으로 보았다. 동욱은 숙경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비록 14금이지만 변하지 않을 내 사랑의 증표로 받아 주십시오!”
그러나 반지가 손가락에 끼워지려는 순간 숙경은 뿌리치려다가 슬며시 보았다.
동욱은 숙경의 손에 반지를 끼워 주고 있었다.
숙경은 눈물을 흘리며 울다가 웃는 아이처럼 피식 웃었다. 동욱도 따라 웃었다.
영원히 변치 않을 것 같은 지금 이 순간 둘의 마음처럼 반지에서 반짝이는 빛!
동욱은 숙경을 와락 끌어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축복의 빛 가득한 그들 모습이 순간에 빛나고 있었다.





작가의 말: 세상에 순수한 사랑이 있을까? 작가는 작품을 새로 시작할 때마다 고민에 빠진다. 순수한 사랑을 그려보고는 싶은데, 영원히 그릴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그러하다. 그것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순수한 사랑을 해보고 싶다고들 말하면서 황금을 녹여서 사치품을 만들 듯이 사랑도 가공하고 포장하려는 것을 볼 때면, 더욱 그러하다. 혹여, 세속에 때 묻지 않은 사랑을 하고 있을 분에게는 대단히 죄송스런 말이 아닐 수 없다. 하기야 잣대로 잴 수 없는 것이 사랑이지만, 나의 식견으론 사랑한다는 말을 한다는 자체가 이미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러하기에 나같이 세속에 때 묻은 사람으로선 아무리 순수한 사랑을 하고 싶어도 어떻게든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겠기에, 평범한 사람으로서 평범한 사랑을 나누고 있을 모든 분에게 축복을 빌어주고 싶은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75년 나환자촌을 방문하여 취재하고,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하였다.







*1996~1997 경북 출신 작가 특집('인간설화' 작가/'동의보감(허준)'의 작가 이은성(예천)/'축복'의 작가 권기훈(예천에서 나고, 봉화, 영주에서 자람) 등(경북문단) 이 책을 소장하고 계신 분께서 표지와 차례를 복사하여 이메일로 보내주시면 후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7-08-10 11:33:35
이 름 내 용 비밀번호
     
  
이전
  참마음
다음
  권기훈/예성강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