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간행물 등록번호 대전 사 01020
jboard

 
제목
기독교문예 10호 원고 (수필2편)
이름
이뤌순
홈페이지
첨부화일

어머니의 신앙생활







우리 어머니도 나처럼 딸만 둘인 가정에 차녀로 태어났고 나도 역시 그렇게 태어났다.

우리 외할머니께서는 자녀를 많이 출산하셨지만 그 중에 딸만 둘 키우시는데 성공을 하셨다. 그래서 차녀인 우리 어머니를 시집보낼 때 아들 겸 사위 겸 데릴사위로 맞아들였다.

우리 어머니는 노부모를 모시고 살면서 부모님의 애처로운 모습에 늘 마음 아파하시던 중 하루는 보은교회에서 어 전도사-그는 친정어머님을 모시고 사는 독신녀 여전도사-였다. 그분이 십리 길 되는 시골마을 대비에 오셔서 전도지를 주시면서

“예수 믿으면 슬픔, 탄식, 근심, 걱정 없는 하늘나라 천국에 갑니다.”

라고 이야기하고 가셨단다. 어머니는 전도지를 받아 읽으며 그가 남기고 간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렇다! 저 불쌍하신 우리 부모님! 이 세상에서는 아들도 없이 걱정만 하고 고생하고 사셨는데 사(死)후엔 근심 걱정 없는 아름다운 천국에 가서 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다가 십리나 되는 보은교회를 다니기로 결심을 하고 새 출발을 하셨단다.

이때는 기독교핍박이 심한 일정치하였고 첫아기가 막 발자국을 띠는 세 살 배기였다. 내가 어렸을 때 찬송가를 넘기다 보면 가끔 까만 페이지가 넘어갔다. 왜 그러냐고 어머니께 여쭤보면 그것은 일본사람이 못 부르게 지워 놓은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이웃집에 사는 꽃 새댁 친구에게 전도를 해서 5리 길 되는 시골 노티교회를 함께 다니셨다. 아기 엄마들이기 때문에 추운 때는 바람을 거슬러 노티교회까지 가기가 힘들어지면서 밤이면 최영수님-그분은 자녀가 없이 두 양주가 외롭게 사시는 연세 높으신 분-이 우리 집으로 오셔서 예배인도를 하셨다. 그러다가 최영수님이 연로하셔서 세상을 떠나실 때 어머니는 마지막 임종도 딸처럼 지켜보셨고 늘 그 분을 애석해 하시다가 몇 년 후에 묘소에 비석까지 해 세우셨다.

노티교회로 다니기가 거리 상 불편해 예배당 건물을 헐어다 우리 대비마을로 옮겨왔다. 이때 보은교회에서 오신 김대천 전도사님은 어머니와, 어머니 친구, 세 가정이 모여서 가족적인 분위기로 예배를 드리며 재미있게 교회가 조금씩 성장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김대천 전도사님은 지나친 생활고로 군청 산림계에 취업을 하셨다.

그래서 지방에 있는 다른 교회에 교역자님들이 먼저 자기 교회에서 예배인도를 하고 그 다음 우리 교회를 오셨다.

그때 교역자님들 여러분-거현교회에 계시던 백낙성 목사님, 종곡교회에 계시던 이병렬 장로님, 월용교회에 게시던 신성대 장로님-이 우리교회를 거쳐 가셨다. 이 분들은 모두 수 십리를 걸어서 우리교회를 다니시고. 후에는 모두 목사님이 되셨다. 작은 농촌교회에서 우리 어머니는, 오시는 교역자님들마다 식사와 숙소를 제공하셨다.

겨울이면 교회에 무쇠난로가 하나있지만 땔감도 변변치 않아 연기만 나 맵기만 하고 너무 추웠다. 그래서 교인들이 예배만 마치면 우리 집으로 와 따뜻한 방에서 몸도 녹이고 따끈한 김치죽으로 추위를 풀고 가셨다.

성탄절이면 새벽 송가기 전에 칼국수나 식혜를 뜨겁게 끓여서 먹여 보내고 낮에는 큰 가마솥에 네 꼭지 시루를 앉히고 시루떡을 만들고 김칫국을 끓여서 주일학생까지 다 배불리 먹이면서 즐거운 성탄절을 보냈다. 우리 어머니는 오로지 교회에만 정을 붙이고 충성을 다 하다 보니 어린 딸이 어느 틈새에 끼여서 무엇을 어떻게 먹고 크고 있는지 다소 소홀했던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됐다. 그래서 뼈도 약하고 키도 엄마만큼도 못 크고 너무 유약해서 어머니의 애물단지로 걱정을 많이 끼쳐드렸다.

우리 어머니는 베뢰아 교회에 자주장사 루디아를 연상케 했다. 왜냐하면 보따리 비단 장사를 하신 것이며, 교회를 찾아오시는 손님이나 교역자님들을 우리 집에서 친히 모셨던 일들이다.

목사님을 모실 때 아버지는 아들을 얻겠다고 다른 여자를 맞아들여 딴살림을 차리고 있으면서 어머니에게 많은 억지소리를 하셨다.

“목사가 네 서방이냐? 목사는 무엇으로 먹여 살리느냐?”

이때 어머니는 ‘교회에서 성미를 줘서 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지만 사실은 교인이 몇 안 돼 성미 몇 되박 나오는 때였다.

어머니가 전도한 친구(최집사님)의 아들이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운 환경에서 신학교를 다닐 때 집에 오면 교통비를 하라며 주머니에다 돈을 넣어주시던 일,

형부가 신학교에 다닐 때 경제 문제로 한 학기 쉬겠다고 하는 것을, 공부는 때가 있는 것이라며 기어코 등록금을 마련해 공부를 계속하게 하셨다.

작은 시골 교회에서는 교인도 적지만 주일학교 교사를 할 만한 사람은 더 더욱 부족했다. 초창기에는 우리 어머니, 기태(현 의림교회 목사) 어머니가 교회하교 교사였지만 나중엔 그분들에게 배운 우리가 교회 학교 교사가 되었다.

어머니는 내가 시집 올 때 함께 오셔서 아이들도 길러주시며 둘째 사위가 목사가 되기까지 희생적으로 도와 주셨다.

주의 종을 잘 받들던 어머니의 신앙생활은 두 사위가 목사가 되고 선지자의 가족이 되어 그 상을 받아 누리며 행복해 하시다가 74세의 연세로 고통 없이 평안히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2009 11. 30.목)








라면의 효능







1964년 충북 보은 친정교회에 전도사로 시무하던 남편은 장로회 신학대학교(통합) 졸업반이 되는 해 봄, 경기도 파주 갈현교회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때 우리는 5남매의 부모가 되어 있었고 새내기 전도사 살림에 가족을 다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거리도 멀기 때문에 첫 째와 세 째 넷째는 친정 엄마에게 맡기고 집과 가구도 다 그대로 두고 떠났다. 간단한 보따리와 5남매 중 둘째와 막내 2개월 된 아기를 데리고 버스도 타고 기차를 타면서 이사를 하는데 둘째는 기차 안에서 홍역 꽃이 이마에 돋아나고 있었다. 나중에 소식을 들으니 고향에 두고 온 세 째와 넷째도 홍역을 앓느라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이사를 가보니 이 교회는 전임 전도사가 10년을 섬기면서 교인들과 두터운 정을 쌓아오다가 갑자기 하는 말이 이제까지 자기가 신앙생활을 헛해 왔다면서 전교인들을 구원파로 이끌어갔다고 한다. 서울 서 노회에서 보조를 받던 교회가 그렇게 되니 보조도 끊기고 전도사가 생활이 안 되니 사임해 가고 그때 극동방송국에 권신찬 목사가 방송을 통해서 날마다 구원 파 논리를 펼치는 때여서 갈현교회는 전교인이 권신찬 목사의 설교에 푹 빠져 있었다.

장로님 한 분이 그 패거리에 휩쓸리지 않고 교역자를 모시자고 하니까 그러면 교역자를 모셔서 자기들의 구원파로 흡수하자고 계획을 세웠다. 고 한다. 그들은 라디오를 옆에 놓고 들으며 권신찬 목사의 말이 참 진리라며 예배시간도 라디오로 대신하는 그들이었다.

그들의 주장은 한번 회개하므로 과거와 현재 미래의 죄까지도 다 도말해 주신다고 했는데 기성교회에서는 왜 아직도 회개하라 외치는가......?

성전은 성령이 거하는 마음이 성전인데 왜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치장하며 꾸미는가......?

하면서 교회가 너무 낡아 초라하기 그지없어도 수리도 하지 않고 청소도 하지 않았다.

이사 가던 해 여름방학이 되자 남편은 벽돌을 한 차 사다 부려 놓고 유리 창틀 밑을 다 허물고 혼자서 벽돌을 쌓아 수리를 싹 해놓았다. 남편(전도사)은 외조부가 목수인지라 어깨 너머로 배운 기술로 20세 때 자기 텃밭에다 ‘ㄱ’자 기와집을 손수 짓고 결혼을 한 아마추어 목수였다.

못 하나도 박을 줄 모르는 장로님은 너무 놀라워하시며 감탄사만 쏟아낼 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성전에 대한 인식을 차츰 바꾸어 놓으니 초등학교 6학년 생 다섯 명이 날마다 학교만 끝나면 교회에 들려 청소를 해 놓고 반들반들 윤이 나는 마룻바닥에 뒹굴며 좋아했다.

구원 파(모임 패)는 밭에서 호미로 일해도 마음에서 예배하면 되지! 왜 꼭 예배당에 가서 예배해야 되는가......? 모든 율법 철학은 마지막 때에 다 불 태워버리겠다. 고 했으니 예배 순서(주보)도 율법이며 앉아서 눈감고 기도하는 것도 율법이라며 기도시간에도 눈뜨고 시계 보며 자유로운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우리는 그런 상황을 전혀 모르고 간 상태인지라 밤마다 황당한 저들의 행동에 시달렸다.

남편은 내일이면 서울에 학교를 가야하는 데 밤마다 찾아와 빙 둘러앉아(모임 패) 전도사에게 성경을 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성경을 펴지 않고 ‘말씀해 보세요.’ 하며 묵비권 행사만 하고 있으니 저들은 너무 답답해하며 전도사가 교만하니 뭐니 이 말 저 말이 새어 나왔다. 저들의 계획이 빗나가니 저들은 성미를 뜨지 말자 그러면 굶다가 보따리를 쌀게 아니냐! 이런 말들이 들려오자 우리는 오기가 생겼다. 어느 날 수요예배 기도시간에 웅성웅성하기에 눈을 떠보니 다 나가버렸다.

교인 80%가 나가 교회 밑에 모 집사 집에서 모임 패식으로 예배를 하며 지붕 꼭대기에다 확성기를 달아놓고 소리 높여 복음 송을 부르며 우리의 예배를 방해하는 것이었다.

믿지 않는 이방 사람들에게도 이런 말들이 퍼지자 이방사람들이 채소며 먹을거리를 가져왔다. 마치 엘리야에게 까마귀가 먹을 것을 물어다 준 것처럼…….

교회 지대가 높아 우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우물 파기는 아예 일지감치 포기하며 살아온 교회 인지라 남의 집 우물을 길러오던 때였다. 10여m내려가 황집사 댁에서 길러오던 물은 소금을 탄 듯 염기가 있는 물이었다.

외조부께 풍수지리를 자연스럽게 익힌 남편은 용감하게 사람을 사서 우물을 파기 시작했다. 3m 정도 팠는데 축축한 모래흙이 나오더니 이어 생수가 솟아나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을 수가…….

저들은 모였다면 빙 둘러앉아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를 가운데 앉혀 놓고 성경을 펴 돌아가며 읽다가 가운데 사람이 손을 번적 들며

“나 구원 받았습니다.”

하면 그 성경 구절을 기억하며 그 때와 시를 구원 받은 날자와 시로 머릿속에 입력해 둔다. 저들은 누구를 만나던, ‘구원 받았습니까’ 물어서 년 월 시를 대답 못하면 지옥자식으로 간주해 버린다.

이 때 우리 집 둘째가 국민학교(초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하루는

“엄마 나 학교 가기 싫어!”

“웬 일이야? 왜 학교가 가기 싫어?”

“학교 가면 나를 지옥자식이라고 놀리고 돌을 던져요.”

이 말을 들은 나는 암담했다. 이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기도하면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52년 전이기 때문에 라면이 대중화 되지 않고 선호하는 때였다. 하루는 담임 여 선생님을 집으로 초청하고 라면을 정성껏 끓여 대접하면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면서 부탁을 드렸다. 그랬더니 어떻게 처세를 했는지 공교롭게도 아무 탈 없이 원래의 모습대로 쾌활하게 학교에 잘 적응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무서운 학교 폭력이 라면 한 개의 효능으로 해결됨이 엄청 대단한 감사로 느껴진다.

지금은 그 아들이 바르게 잘 자라나 서울에 중형교회에 안수집사로 국민은행 명동 본점에 여신부장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성실히 살아가고 있다.



E-mail : SW2524@hanmail.net
전화 : 070-7787-2532, h. p : 010-6759-2533
2015-03-28 11:29:31 / 182.227.180.147
     
  
이전
  기독교문예 10호 원고 (수필2편)
다음
  기독교문학 10호 원고(시 3편)